연금경제

[나이듦을 공부합니다] 시간 앞에서의 겸손

나이듦의 평범성에 대하여

홍태준 기자

▶필자 소개

지난 9월 첫 번째 주말, 서울시민대학(서울시와 서울평생교육진흥원이 운영하는 시민 대상 평생교육 플랫폼)의 한 강의에 참석했다. 4060을 대상으로 하는 강의로, 이 연령대에 어떤 강의를 하는지 순전히 호기심에 신청해 보았다. 거리는 멀지 않지만 교육장은 초행길이어서 시간 여유를 가지고 출발했다. 하지만 잠시 딴생각을 한 데다 이어폰을 꽂고 있어 버스의 하차 방송을 놓쳤고, 두 정거장이 지나서야 목적지를 지나온 것을 깨달았다.

버스 어플을 보니 다행히 바로 건너편에 정류장이 있었고, 내가 타야 할 버스도 5분 내 도착 예정이었다. 다시 버스를 타고 출발하려는 순간, 초로의 여성 한 분이 허겁지겁 올라탔다. 그리고 기사분께 물었다. "00대에 가나요? 돌아가서 가는 버스 아니죠?" 00대에 가는 여러 버스 중에는 바로 가는 것도, 여러 역을 거쳐 돌아가는 것도 있다고 했다. 기사님은 "00대에 가요"라고만 할 뿐 정확한 정보를 주지 않았고, 그 여성분은 계속 불안해했다. 나도 같은 곳에 가는 중이었기에 저를 따라 내리시라고 안심시켜 드렸다. 그때는 몰랐다, 이 짧은 만남이 그날 내가 배울 것의 예고편이었다는 걸.

강의장은 정문에서 멀지 않았지만 약간의 오르막길을 올라야 했다. 강의 시작 시간이 간당간당해서 내리자마자 뛰는 듯한 걸음으로 들어갔다. 교육은 40대부터 60대를 대상으로 한다고 했지만, 강의장에는 60대 이상으로 보이는 분들이 대다수였다. 내가 맞게 찾아온 걸까 하는 생각이 스쳤지만, 친절하게 자리를 안내받은 덕분에 곧 강의에 집중할 수 있었다. 한참 후, 아까 버스에서 질문하셨던 그 여성분이 강의장을 못 찾아 헤매다 뒤늦게 들어와 내 옆에 앉으셨다. 어떤 용무로 오셨는지 인사 겸 물어보고 함께 왔더라면 좋았을걸. 미간에 송골송골 맺힌 땀을 보며 짧은 후회가 들었다.

강의 내용은 인생 후반기 에이징 라이프 시뮬레이션이었다. 각자 본인이 생각하는 기대수명과 건강수명을 예상해보고, 일상생활을 영위하는 데 도움이 필요해지는 시점을 결정한다. 그리고 AI와 휴머노이드 등 기술의 도움을 받아 청소, 요리, 집 관리 같은 일상 업무를 독립적으로 수행하기 위한 상황과 해법을 조원들과 함께 토론하는 방식이었다. 조용히 듣고만 가려 했는데 모든 참가자가 나가서 발표를 해야 한다는 말에 중간에 도망칠까 싶기도 했다.

그런데 다른 참가자들의 자기소개를 들으며 자세를 고쳐 잡았다. 희끗희끗한 머리로 오르막에 숨차하던 그분들은, 지금 같은 K열풍이 일기 전 해외에서 한국 문화를 열심히 알리던 한국어 강사, 사업가, 시니어 모델, AIP(Aging In Place) 정책을 담당하던 정책관 등 얼마 전까지 여러 분야의 현역이었다. 활발한 이력답게 자기소개와 발표, 기술에 대한 이해와 응용까지 유려한 언변이 차고 넘쳤다. 참가자 중 한 분은 주말에 올 예정인 손주와 함께하는 시간을 준비하는 내용을 발표하셨다. 요즘 아이들의 취향과 관심사를 알기 위해 정보를 모으고, 시간 계획을 짜며 미리 선물을 준비하는 과정까지 휴머노이드와 AI를 적절하게 활용한 탄탄한 시나리오가 인상적이었다.

발표를 들으며 반백의 머리에 약간 주름진 초로의 군상으로만 보이던 참가자들이 입체적으로 보이기 시작했다. 한때 라틴아메리카를 누비던 어떤 이는 이제 한국의 빠른 교통 시스템에 적응하기 어려운 노인이 되어 있었다. 옆 강의실에서 준비한 다과를 잘못 가져온 일흔의 할아버지는, 모델이거나 고급 공무원이었을 것이고, 누구보다 빠르고 오래 달릴 만큼 건강했을 것이다. 그들 모두 어린 자녀를 둔 젊은 부모였을 것이고, 자녀들을 데리고 스마트폰 안내 없이도 차를 몰아 숨은 여행지를 찾아갈 만큼 길눈이 밝았을 것이다.

나이 듦은 평범할 뿐 심오한 현상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 설명할 수 없는 감각이 내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혔다. 자기소개와 발표를 들으며, 그들 내면에 아직 나이 들지 않은 자아가 '내가 어쩌다 여기까지 왔지?'라는 질문을 품고서도, 마주한 현실을 명랑하고 밝게 끌어안으려 한다는 기운을 느낄 수 있었다.

강의가 끝나고 나오는 길, 버스에서 만났던 그 여성분과 다시 마주쳤다. 오르막을 오를 땐 숨차하고 강의장을 찾을 땐 헤매던 그분이지만, 한때는 분명 지금의 나보다 더 씩씩하게 낯선 길을 헤쳐나갔을 것이다. 그 사실을 알고 나니, 처음 버스에서 느꼈던 안쓰러움이 조금 다른 색으로 바뀌었다. 앞으로 길을 헤매거나 키오스크 앞에서 난처해하는 노인을 볼 때마다, 나는 아마 그 안에 숨겨진 또 다른 자아를 먼저 떠올리게 될 것 같다. 이번 수업에서 내가 배운 것은 미래에 대한 계획이 아니라, 시간 앞에서의 겸손이었다.

 

홍태준 기자askhongpt@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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