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금경제

은퇴자금, "얼마나 모았나"보다 "어떻게 꺼내 쓰나"가 더 중요한 이유

30년을 버티는 인출률은 정말 4%가 맞을까요?

문유정 기자

▶필자 소개

은퇴 설계를 이야기할 때 대부분은 "노후 자금으로 얼마를 모아야 하는가"라는 질문에만 집중합니다. 하지만 은퇴 이후의 삶은 자산의 규모만큼이나 '어떻게 꺼내 써야 오래 버틸 수 있는가'가 결정적인 변수입니다. 자산이 고갈된 후에도 삶이 지속되는 이른바 '장수 리스크(Longevity Risk)'를 고려한다면, 어쩌면 저축보다 더 치밀한 인출 전략이 필요할지 모릅니다.

그렇다면 은퇴 후 매년 자산의 몇 퍼센트(%)를 인출해야 30년 이상의 노후를 안전하게 보낼 수 있을까요? 이 질문에 대해 전 세계 재무 설계의 표준을 정립한 인물이 있습니다. 바로 미국의 재무 설계사, 윌리엄 벤겐(William P. Bengen)입니다. 그는 1994년 발표한 논문 「역사적 데이터를 활용한 인출률 결정(Determining Withdrawal Rates Using Historical Data)」을 통해 은퇴 인출 전략의 핵심인 ‘4% 룰’을 제시하며, 오늘날 은퇴 설계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열었습니다.

기사 이해를 돕기 위한 AI 생성 이미지 | 윌리엄 벤겐이 제시한 '4% 룰'
기사 이해를 돕기 위한 AI 생성 이미지 | 윌리엄 벤겐이 제시한 '4% 룰'

 

평균의 함정 : 8% 수익률을 믿으면 안 되는 이유

흔히 은퇴 설계 현장에서 “주식과 채권에 분산 투자하면 연평균 8% 수익이 가능하고, 물가상승률 3%를 제외해도 실질 5% 수익이 남으니 매년 자산의 5%씩 인출해도 문제가 없다”라는 식의 논리가 자주 등장합니다.

하지만 벤겐은 이를 “평균의 함정”이라고 단호히 경고합니다. 은퇴 초기 몇 년 동안 시장이 급락하거나 고물가 상황이 겹치면, 장기 평균 수익률이 아무리 훌륭해도 자산은 회복 불가능한 속도로 고갈되기 때문입니다.

벤겐은 1930년대 대공황, 1970년대 오일쇼크 등 실제 시장의 위기 구간을 시뮬레이션하며, 은퇴 설계는 ‘평균적인 기대치’가 아닌 ‘최악의 시나리오’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는 구조여야 함을 증명했습니다. 결국 은퇴 설계의 성패는 좋은 시절의 수익률이 아니라, 수익률이 나쁜 시기를 견뎌낼 수 있는 인출 전략에 달려 있다는 점을 강조한 것입니다.

 

‘4% 룰’의 발견 : 최소 30년은 버티는 마법의 숫자

벤겐은 1926년부터 1992년까지의 시장 데이터를 바탕으로 포트폴리오의 수명을 분석했습니다. 그가 설명한 규칙은 명확합니다. 은퇴 첫해 자산의 X%를 인출하고, 이듬해부터는 전년도 인출액에 물가상승률만큼을 더해 인출하는 방식입니다.

구분결과최소 생존 기간
연 3~3.5%최악의 시기에 은퇴했어도 안정적으로 유지50년 이상
연 4%대공황, 오일쇼크 시기 은퇴를 포함해도 유지33년 이상
연 5% 이상나쁜 시기에 인출할 경우 조기 고갈 위험 급증20년 이내 고갈 가능

결론적으로 은퇴 첫해에 자산의 4%를 인출하고, 이후 매년 물가상승률만큼 증액하여 인출한다면, 어떤 최악의 시장 상황을 맞이하더라도 최소 30년은 자산이 고갈되지 않는다는 점이 증명되었습니다.

 

은퇴 후에도 주식이 필요한 이유 : 50~75%의 미학

많은 은퇴자가 은퇴와 동시에 주식을 전량 매도하고 예금이나 채권 등 안전자산으로만 포트폴리오를 구성하곤 합니다. 하지만 벤겐의 분석 결과는 이러한 일반적인 통념과는 정반대를 가리킵니다.

주식 비중을 25% 이하로 지나치게 낮추면 포트폴리오의 전체적인 기대 수익률이 하락합니다. 이는 결국 인플레이션과 매년 발생하는 인출액을 감당하지 못하게 만들며, 결과적으로 자산이 더 빠르게 고갈되는 '수익률 부족의 역설'을 초래합니다.

벤겐은 역사적 데이터를 통해 주식 비중을 50~75% 구간에서 유지하는 것이 가장 안전하다고 결론지었습니다. 실제로 주식 비중을 75%까지 높일 경우, 시장이 최악인 상황에서도 50:50 포트폴리오와 대등한 생존 기간을 확보할 수 있었습니다. 여기에 더해, 사후 자녀에게 물려줄 ‘잔여 자산’ 규모가 훨씬 커지는 부가적인 효과까지 확인되었습니다. 즉, 은퇴 자산 운용에서 주식은 단순히 수익을 쫓는 도구가 아니라, 긴 노후를 지탱하는 필수적인 방어 기제인 셈입니다.

 

위기 상황에서의 심리 관리: ‘블랙홀’에서 탈출하기

벤겐은 은퇴 직후 시장 폭락을 맞는 이들을 ‘블랙홀’ 그룹이라 불렀습니다. 이들은 공포에 질려 주식을 전량 매도하고 안전자산으로 도피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벤겐은 폭락장에서의 투매야말로 은퇴 설계를 무너뜨리는 가장 확실한 길이라고 경고합니다.

시장 상황이 나쁠 때는 오히려 인출액(소비)을 조금 줄여 포트폴리오가 회복할 시간을 벌어주고, 정해둔 자산 배분 원칙(주식 비중 유지)을 지키는 것이 장기 생존율을 높이는 길입니다.

 

“얼마나 모을까”에서 “어떻게 쓸까”로

벤겐의 연구가 30년이 넘도록 은퇴 설계의 고전으로 인용되는 이유는, 은퇴를 바라보는 관점 자체를 완전히 뒤바꿔 놓았기 때문입니다. 은퇴 이후에는 월급이라는 정기적인 현금 흐름이 끊깁니다. 따라서 자산은 이제 '불려야 할 대상'이 아니라, 삶을 '지탱해야 할 버팀목'이 되어야 합니다. 이 시기에는 단순히 수익률을 높이는 것보다 인출의 순서와 타이밍, 그리고 시장 상황이 악화되었을 때를 견뎌낼 수 있는 구조를 만드는 것이 훨씬 중요합니다.

 

지금 은퇴 자산을 설계하고 있다면, 다음 두 가지 원칙을 반드시 점검해 보시기 바랍니다.

✓인출률의 원칙: 첫해 자산의 4% 내외를 인출하고, 이후에는 물가상승률만큼만 증액한다.

✓자산 배분의 원칙: 은퇴 이후에도 주식 비중을 50~75% 수준으로 유지해, 장수 리스크에 대응한다.

이제 은퇴 설계는 “얼마를 모았는가”라는 저축의 논리에서 “수익률이 나쁜 시기를 만나더라도 흔들리지 않을 구조를 만들었는가”라는 인출의 논리로 전환되어야 합니다. 벤겐이 30년 전 제시한 연구는 지금도 그 질문에 대해 가장 실용적이고도 냉철한 해답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이제 그 지혜를 빌려 노후를 더 단단하게 설계해 볼 차례입니다. 현재 운용 중인 은퇴 자산이 과연 이 ‘4% 룰’을 이행할 수 있는 구조인지, 차분히 점검해 보시기 바랍니다.

 

※본 칼럼은 윌리엄 벤겐의 1994년 연구 결과를 소개한 것으로, 실제 투자 결과나 개인의 은퇴 설계 성과는 보장하지 않습니다.

 

문유정 기자kidcol0302@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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