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0조 시장 개편의 핵심은 ‘공공 확대’보다 ‘경쟁과 지배구조’
▶필자 소개

국민연금공단이 퇴직연금 시장에 직접 들어오는 것이 과연 바람직할까요? 최근 기금형 퇴직연금 도입 논의 과정에서 국민연금공단이 퇴직연금기금을 직접 운용하거나 외부전담운용기관(OCIO)으로 참여하는 방안이 거론되고 있습니다. 국민연금의 높은 운용수익률과 기존 운용 인프라를 활용하면 퇴직연금 수익률을 높이고 비용도 낮출 수 있다는 논리입니다.
자본시장연구원이 최근 발간한 ‘초고령사회 다층노후소득을 위한 퇴직연금제도 개편’ 보고서는 이에 대해 분명한 문제를 제기했습니다. 국민연금과 퇴직연금은 이름에 ‘연금’이 붙어 있을 뿐 운용 목적과 위험구조가 서로 다르다는 것입니다. 국민연금은 운용성과와 개인별 급여가 직접 연결되지 않는 공적연금인 반면, DC형 퇴직연금은 근로자 개인의 퇴직 시점까지 쌓인 운용성과가 노후자산을 좌우합니다. 두 연금에 적합한 포트폴리오가 같을 수 없는 이유입니다.
국민연금이 퇴직연금을 운용하려면 기존 국민연금 포트폴리오에 퇴직연금 자금을 얹는 방식만으로는 해결하기 어렵습니다. 별도의 운용조직과 전문인력, 독립적인 운용 인프라를 구축해야 합니다. 그렇게 되면 기존 인프라를 활용해 비용을 크게 낮출 수 있다는 장점도 희석됩니다. 공공기관이라는 이유로 낮은 운용보수를 적용한다면 이는 결국 정부의 간접적인 재정지원이라는 점에서 근로복지공단이 운영하는 중소기업퇴직연금기금과 본질적인 차별성을 찾기도 어렵다는 것이 보고서의 지적입니다.
게다가 국민연금공단이 OCIO 사업자로 참여하는 문제에는 보다 신중한 접근이 필요합니다. OCIO는 금융회사들이 경쟁하는 대표적인 민간 자산운용시장입니다. 보고서는 특정 자금의 운용에서 공공기관이 민간 금융회사보다 효율적이라는 이론적·실증적 근거를 찾기 어렵다고 지적합니다. 설령 공공기관이 높은 효율성을 보인다고 해도 공공기관이 민간 자산운용시장을 구축(crowding out)하는 상황 자체를 경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보고서는 한발 더 나아갑니다. “국민연금공단이 제시하는 다양한 형태의 참여 방안 모두 공공이 민간 시장에 개입할 때 전제되어야 할 논리적 당위성은 부족한 반면 민간시장 구축이라는 부정적 우려는 확정적”이라고 평가합니다. 국민연금·퇴직연금·개인연금이라는 다층연금체계를 구축하는 취지에서도 서로 다른 연금제도의 운용주체를 하나의 공공기관으로 중첩시키는 방식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주장입니다.
500조 퇴직연금, ‘저축’에서 ‘장기투자’로
국민연금의 시장 참여 여부보다 더 중요한 문제는 우리 퇴직연금 자체의 체질 개선입니다. 퇴직연금 적립금은 2020년 말 255조5000억원에서 2025년 말 501조4000억원으로 불과 5년 만에 96.2% 증가했습니다. 문제는 규모와 운용의 질 사이에 상당한 간극이 있다는 점입니다. 2025년 말 전체 적립금의 75.4%가 원리금보장상품에 들어가 있고, 10년 평균 수익률은 2.64%에 그칩니다.

보고서는 현재 구조가 이어질 경우 퇴직연금의 소득대체율은 13% 수준을 넘기 어렵지만, 중도누수를 막고 운용수익률을 높이면 20% 이상으로 끌어올릴 수 있다고 분석합니다.
운용방식에 따른 수익률 차이도 뚜렷합니다. 2025년 전체 퇴직연금 수익률은 6.47%였지만 DB형은 3.53%, DC형은 8.47%, IRP는 9.44%였습니다. 장기 성과를 보더라도 최근 10년간 원리금보장상품의 평균 수익률은 2.11%인 데 비해 실적배당상품은 4.48%였습니다. 결국 500조원을 넘어선 퇴직연금의 다음 과제는 ‘얼마나 많이 쌓느냐’에서 ‘어떻게 운용하느냐’로 이동하고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보고서는 퇴직연금 개편의 핵심을 ‘저축에서 장기투자로의 전환’으로 규정합니다. 장기 연금자산은 투자기간에 상응하는 위험프리미엄을 확보하면서 자산과 지역을 분산한 글로벌 포트폴리오로 운용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개인에게 지나친 투자판단 책임을 맡기기보다는 간접투자와 위탁운용을 확대해 전문적인 자산배분 역량을 활용할 필요성도 강조합니다.
이를 위한 주요 해법 가운데 하나가 기금형 퇴직연금입니다. 하지만 기금형을 단순히 여러 근로자의 돈을 한데 모아 규모를 키우는 제도로 이해해서는 곤란합니다. 핵심은 돈을 모으는 방식이 아니라 ‘누가 어떤 책임을 가지고 의사결정을 하느냐’에 있습니다. OECD와 국제연금감독기구(IOPS), 영국과 호주 등의 사례가 공통적으로 강조하는 것도 독립적인 지배기구, 전문성, 수탁자책임, 이해상충 관리, 투명한 정보공개와 감독입니다. 이 같은 장치가 갖춰져야 집합운용에 따른 규모의 경제가 실제 가입자의 이익으로 연결될 수 있습니다.

기금형 퇴직연금, 목적에 따라 역할도 달라야
해외 사례도 흥미롭습니다. 영국의 공공형 기금 NEST는 민간 금융회사와 정면으로 경쟁하도록 설계되지 않았습니다. 사업성이 떨어지는 소액계좌까지 조건 없이 받아들이는 역할을 맡습니다. 2025년 말 전체 마스터 트러스트 계좌의 45.5%를 차지하지만 운용자산 기준 점유율은 19% 수준입니다. 공공기금의 목적을 시장점유율 확대보다 사각지대 해소에 둔 셈입니다.
우리나라가 추진하는 기금형 퇴직연금도 하나의 모델로 획일화하기보다 목적에 따라 구분할 필요가 있습니다. 보고서는 비영리 연합형, 금융기관 개방형, 공공형을 서로 다른 제도로 바라봐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비영리 연합형은 산업·직종·단체를 중심으로 규모의 경제와 지속 가능한 연대를 만드는 것이 목표입니다. 금융기관 개방형은 금융회사의 운용 전문성과 경쟁을 활용해 장기수익률을 높이는 데 초점을 맞춥니다. 공공형은 중소·영세사업장의 퇴직연금 사각지대를 줄이고 안정적인 수급권을 확보하는 것이 우선입니다.
따라서 성적표도 달라야 합니다. 공공형은 가입률과 수급권, 비영리 연합형은 지속성과 확장성, 금융기관 개방형은 위험조정 장기수익률을 중심으로 평가하는 것이 합리적입니다. 특히 공공형 기금의 성과를 기금 규모나 높은 수익률만으로 평가할 경우 공공기금 본래의 목적이 왜곡될 수 있습니다.
기금형과 계약형, 경쟁과 병존이 필요하다
또 하나 주목할 부분은 기금형이 기존 계약형 퇴직연금을 모두 대체하기 어렵다는 점입니다. 보고서는 장기적으로도 계약형이 전체 시장의 50% 이상에서 병존할 것으로 전망합니다. DB형이 상당한 비중을 유지하는 데다 적극적으로 자신의 연금을 운용하려는 DC·IRP 가입자에게는 계약형이 더 적합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기금형 도입과 계약형 개혁은 동시에 추진해야 합니다.
DB형에서는 형식적으로 운영되는 적립금운용위원회와 적립금운용계획서(IPS)를 실질화하고, 자산·부채관리(ALM)에 기반한 자산배분과 OCIO 일임운용을 확대할 필요가 있습니다. DC형에서는 현재의 사전지정운용제도를 진짜 ‘디폴트’ 제도로 바꾸는 것이 핵심입니다. 현행 제도는 가입자가 디폴트상품을 다시 선택해야 하는 옵트인(opt-in) 구조입니다. 보고서는 이를 비선택자의 자산이 자동으로 장기 분산투자되는 옵트아웃(opt-out) 방식으로 전환하고, 원리금보장상품 중심의 적격상품 구조 역시 TDF·TRF 등 장기 자산배분형 펀드를 중심으로 단순화할 것을 제안합니다. 계약형과 기금형은 어느 하나가 다른 하나를 몰아내는 관계가 아니라 서로 보완하는 복수의 지배구조라는 설명입니다.
제도가 이렇게 바뀌면 금융회사들의 경쟁 방식 역시 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지금까지의 경쟁이 상품 판매와 단기 수익률, 사업자 간 적립금 유치에 집중됐다면 앞으로는 지배구조와 장기 자산배분, 위험관리, 비용, 장기 운용성과가 경쟁력을 좌우하게 됩니다. 퇴직연금사업자 역시 단순한 상품 판매자에서 벗어나 가입자의 노후자산에 실질적인 운용책임을 지는 수탁기관으로 변화해야 합니다. 이를 위해 자산배분, ALM, OCIO, TDF, 위험관리 역량을 갖춰야 한다는 것이 보고서의 주문입니다.
결국 퇴직연금 개혁에서 던져야 할 질문은 ‘국민연금처럼 큰 기관을 하나 더 만들 것인가’가 아닙니다. 근로자의 20~30년에 걸친 노후자산을 누가, 어떤 책임 아래, 어떤 경쟁구조에서 운용하도록 만들 것인가가 핵심입니다.
500조원을 넘어선 퇴직연금 시장에 필요한 것은 거대한 단일 운용주체보다 제대로 작동하는 복수의 운용주체와 경쟁입니다. 공공형은 시장이 외면하는 사각지대를 메우고, 민간은 전문성과 장기 운용성과로 경쟁하며, 기금은 가입자의 이익을 최우선으로 하는 독립적인 지배구조를 갖추는 것입니다. 퇴직연금 개혁의 목적은 ‘공공이냐 민간이냐’를 결정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500조원의 퇴직연금을 20년 뒤 국민의 실제 노후소득으로 얼마나 많이 바꿔 놓을 수 있느냐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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