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금경제

[시네마은퇴] 영화 '장수상회', 사랑에도 돌봄이 필요한 시간이 온다

70세 첫사랑 뒤에 감춰진 치매와 가족 돌봄의 현실 치매가 바꾸는 노후…생활비부터 돌봄비까지 함께 준비해야

문유정 기자
사진 ㅣ 영화 '장수상회' 포스터
사진 | 영화 '장수상회' 포스터

틈만 나면 버럭 화를 내는 까칠한 노신사 성칠(박근형 분). 해병대 출신이라는 자부심은 넘치지만, 배려나 다정함과는 거리가 먼 사람입니다. 그런 그의 앞집으로 고운 외모의 여인 금님(윤여정 분)이 이사를 오면서, 스크린에는 봄바람이 살랑거리기 시작합니다.

2015년 개봉한 영화 <장수상회>(감독 강제규)는 이렇게 시작합니다. 70세에 찾아온 사랑은 서툴지만 설레고, 동네 사람들은 두 사람의 만남을 흐뭇하게 지켜봅니다. 그렇게 황혼의 로맨스를 따라가던 영화는 후반부에 이르러 전혀 다른 이야기를 꺼내놓습니다. 성칠은 치매를 앓고 있었고, 그가 새롭게 사랑에 빠졌다고 생각했던 금님은 사실 오랜 세월을 함께한 아내였습니다. 두 사람의 로맨스를 지켜보던 주변 사람들까지 성칠의 가족이라는 사실이 드러나면서, 앞서 펼쳐졌던 장면들의 의미도 달라집니다. 훈훈한 황혼 로맨스로 시작한 영화는 그렇게, 우리 대부분이 언젠가 마주하게 될 또 다른 얼굴의 노후로 방향을 바꿉니다.

 

기억이 흐려진 자리, 가족의 시간이 시작됩니다

치매는 대부분 서서히 진행됩니다. 초기에는 최근 일을 자주 잊거나 같은 질문을 반복하는 등의 변화가 나타나더라도 단순한 건망증이나 나이가 들면서 생기는 변화로 여기기 쉽습니다. 하지만 증상이 진행되면 기억력과 판단력 등 인지기능이 저하되면서 익숙했던 일상생활을 해나가는 데도 점차 어려움이 생길 수 있습니다.

보건복지부가 발표한 '2023년 치매역학조사 및 실태조사'에 따르면, 국내 65세 이상 노인의 치매 유병률은 9.25%로 집계되었습니다. 연령이 높아질수록 유병률도 상승해, 85~89세에서는 25.58%, 90세 이상에서는 29.21%로 나타났습니다. 향후 고령인구가 늘어나면서 국내 치매 환자는 2026년 100만 명을 넘어설 것으로 추계됐으며, 2044년에는 200만 명을 초과할 것으로 전망됩니다. 치매 고위험군으로 꼽히는 경도인지장애 인구 역시 2025년 약 298만 명으로 추계됐으며, 2033년에는 400만 명을 넘어설 것으로 전망됩니다.

영화 속 성칠이 익숙했던 사람과의 관계를 낯설게 받아들이게 된 것처럼, 치매는 기억과 시간에 대한 인식뿐 아니라 익숙했던 사람과의 관계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습니다. 문제는 이 병이 환자 한 사람만의 일로 끝나지 않는다는 데 있습니다.

 

사랑을 지킨 것은 결국 가족의 돌봄이었습니다

사진 ㅣ  영화 '장수상회' 스틸 컷
사진 ㅣ  영화 '장수상회' 스틸 컷


성칠의 로맨스를 마지막까지 함께한 이들은 다름 아닌 그의 가족이었습니다. 아버지가 다시 사랑에 빠진 것처럼 보이는 순간에도, 가족은 그 곁에서 그의 일상을 지키고 있었습니다. 이는 영화적 설정만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에도 전국 수많은 가정에서 반복되고 있는 현실이기도 합니다.

치매가 진행되면 환자의 일상을 돕고 지켜보는 몫은 자연스럽게 가족에게도 돌아갑니다. 돌봄이 장기간 이어질 경우 가족이 감당해야 하는 시간과 경제적 부담도 커질 수 있습니다. 보건복지부의 '2023년 치매역학조사 및 실태조사'에서도 이러한 현실이 확인됩니다. 지역사회에 거주하는 치매 환자 가족의 45.8%가 돌봄 부담을 느끼고 있다고 응답했으며, 돌봄 과정에서 겪는 어려움으로는 경제적 부담을 꼽은 비율이 지역사회 거주 환자 가족 38.3%, 시설·병원 이용 환자 가족 41.3%로 나타났습니다. 치매는 환자 개인의 투병이 아니라, 곁을 지키는 가족의 생활과 소득, 시간에도 영향을 미치는 문제인 셈입니다.

다만 가족이 모든 돌봄을 감당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러한 부담을 나누기 위한 공적 지원제도도 마련되어 있습니다. 정부는 2017년 '치매국가책임제'를 도입해 전국 보건소 산하에 치매안심센터를 설치했습니다. 치매안심센터에서는 무료 치매선별검사를 비롯해 상담, 맞춤형 사례관리, 가족 지원 등의 서비스를 받을 수 있습니다. 또한 노인장기요양보험에는 치매로 인해 장기요양이 필요하지만 신체 기능은 비교적 양호한 사람을 위한 '인지지원등급'이 마련되어 있습니다. 인지지원등급 판정을 받으면 정해진 장기요양서비스를 이용할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필요한 순간에 이러한 제도를 알고 활용하는 것입니다. 인지기능 저하가 의심되거나 치매 진단을 받았다면 가까운 치매안심센터를 찾아 어떤 지원을 받을 수 있는지 확인하는 것도 가족의 돌봄 부담을 사회와 나누는 방법입니다.

 

돌봄의 시간까지 준비하는 노후자금

치매는 장기간 치료와 돌봄이 필요한 경우가 많습니다. 그만큼 비용도 한 번의 치료비가 아니라 오랜 기간 이어지는 의료비와 돌봄비의 형태로 쌓일 수 있습니다. 앞선 조사에서 치매 환자 1인당 연간 관리비용은 지역사회에서 거주할 경우 1,733만 원, 요양시설이나 병원을 이용할 경우 3,138만 원에 달하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돌봄이 장기간 이어지고 필요한 돌봄의 수준이 높아질수록 가계가 감당해야 할 부담도 커질 수 있습니다.

2023년 치매 환자의 치매 관리 비용(자료 : 보건복지부)

구분지역사회 거주 환자시설·병원 이용 환자
총 치매 관리 비용1733.9만 원3138.2만 원
보건의료비438.2만 원1489.1만 원
돌봄비1162.2만 원1533.1만 원
간접비133.5만 원116.0만 원


실손의료보험은 실제 발생한 의료비를 중심으로 보장하기 때문에 간병이나 장기 돌봄 과정에서 발생하는 모든 비용을 보장하는 것은 아닙니다. 따라서 자신이 가입한 보험의 보장 범위를 미리 확인하고, 노인장기요양보험 등 이용할 수 있는 공적 돌봄제도를 함께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필요하다면 치매·간병 관련 민영보험의 보장 여부와 조건도 비교해볼 수 있습니다.

노후자금을 준비할 때도 '내가 아플 때 쓸 돈'만 생각해서는 부족합니다. <장수상회>가 보여주듯, 배우자나 가족을 돌봐야 하는 시간까지 염두에 둘 필요가 있습니다. 배우자 중 누군가 먼저 치매를 진단받는다면 다른 한 사람은 간병을 맡는 동시에 생활비와 돌봄비까지 감당해야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때 중요한 것은 돌봄이 장기간 이어져도 생활을 유지할 수 있는 정기적인 소득 구조를 마련해 두는 것입니다. 국민연금과 퇴직연금, 개인연금 등은 은퇴 이후 기본적인 생활비를 지속적으로 충당하는 소득 기반으로 활용하고, 장기요양보험 등 공적 지원과 별도의 의료·돌봄비 재원을 함께 점검할 필요가 있습니다. 특히 퇴직연금을 목돈이 아닌 연금 형태로 수령하면 장기간 이어지는 노후소득을 확보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돈과 함께 미리 생각해둘 것이 하나 더 있습니다. 치매로 스스로 재산을 관리하거나 중요한 결정을 내리기 어려워질 상황에 대비하는 일입니다. 판단능력이 충분할 때 장래 재산관리와 신상보호에 관한 사무를 맡길 사람을 정해 공정증서로 후견계약을 체결하는 임의후견제도도 미리 살펴볼 수 있습니다. 임의후견계약은 이후 판단능력이 저하된 상황에서 가정법원이 임의후견감독인을 선임하면 효력이 발생합니다.

노후 준비는 결국 얼마를 모아둘 것인가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돌봄이 필요해졌을 때 생활비를 어떻게 이어갈지, 어떤 제도를 이용할지, 스스로 판단하기 어려워졌을 때 중요한 결정을 어떻게 맡길지까지 함께 생각해두는 과정입니다.

 

오래 사랑하려면, 오래 준비해야 합니다

사진 ㅣ  영화 '장수상회' 스틸 컷
사진 ㅣ  영화 '장수상회' 스틸 컷


<장수상회>에서 성칠과 금님의 사랑은 단순한 황혼 로맨스로 끝나지 않습니다. 한 사람의 기억이 흐려진 뒤에도 관계를 이어갈 수 있었던 것은 그 곁을 지키는 가족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영화가 마지막에 남기는 것은 사랑의 설렘보다, 어쩌면 사랑하는 사람의 곁을 끝까지 지킨다는 것의 의미에 더 가깝습니다.

현실에서도 돌봄은 마음만으로 감당하기 어렵습니다. 시간이 필요하고, 생활을 이어갈 소득이 필요하며, 가족의 부담을 덜어줄 제도와 준비도 필요합니다. 노후를 준비한다는 것은 내가 오래 사는 것만 대비하는 일이 아니라, 나와 함께 늙어갈 사람에게 돌봄이 필요한 순간까지 생각해보는 일인지도 모릅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오래 함께하고 싶다는 마음은 누구에게나 있을 것입니다. 그 시간을 끝까지 지켜내기 위해서는 사랑만큼이나 돌봄을 준비하는 일도 필요합니다.

언젠가 사랑하는 사람에게 돌봄이 필요해진다면, 당신은 그 곁을 지킬 준비가 되어 있습니까?

문유정 기자kidcol0302@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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