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직연금 기금형 도입과 국민연금 참여는 전혀 다른 문제다
공적 지위 앞세운 시장 진입보다 독립된 수탁자 간 공정한 경쟁이 우선
▶필자 소개
퇴직연금 기금형 제도 도입 논의와 맞물려 국민연금이 퇴직연금 시장에 참여해야 한다는 주장이 여러 형태로 변형되면서도 끊임없이 제기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퇴직연금 기금형 제도 도입과 국민연금의 퇴직연금 시장 참여는 구분해서 살펴봐야 할 문제입니다.
퇴직연금 기금형 제도는 기업과 금융회사 간 일대일 계약에 의존하는 현행 계약형 구조의 한계를 보완하기 위해 독립된 수탁법인이 적립금을 통합 운용하고, 전문적인 자산배분과 수탁자 책임을 수행하도록 하는 제도입니다. 핵심은 독립성과 전문성, 수탁자 책임, 그리고 가입자 이익의 우선에 있습니다. 이러한 요건을 충족하는 주체 가운데 하나가 반드시 국민연금이어야 할 이유는 없습니다.
오히려 국민연금의 참여가 기금형 제도의 본래 취지를 훼손할 가능성도 살펴봐야 합니다. 기금형 제도는 다양한 주체가 각자의 목적과 가입자 기반에 따라 기금을 만들고 경쟁하는 구조로 발전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런데 국민연금이 출발부터 공적 지위와 압도적인 브랜드 파워를 앞세워 진입한다면 다른 기금의 성장은 시작 단계부터 제약받을 수 있습니다. 여러 독립 기금이 경쟁해야 할 시장이 자칫 ‘국민연금 기금 대 민간 기금’의 대결 구도로 재편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국민연금의 ‘메기 역할’, 공정한 경쟁인가
김성주 국민연금공단 이사장은 국민연금이 기금형 퇴직연금에 참여할 경우 민간 금융기관 간 경쟁을 촉진하는 ‘메기’ 역할을 할 수 있다는 입장을 밝혔습니다. 낮은 수수료와 높은 수익률을 통해 기존 퇴직연금 시장에 경쟁을 촉진하겠다는 취지입니다.
그러나 국민연금은 민간 사업자와 동일한 조건에서 경쟁하는 사업자가 아닙니다. 국민연금공단은 법률에 근거해 설립된 공적기관이며, 국민연금이라는 공적연금 제도를 운영하는 기관입니다. 국민연금이 가진 이름과 조직, 인력, 정책적 지원, 국민적 인지도를 민간 금융회사가 보유한 경쟁 자원과 동일하게 평가하기는 어렵습니다.
민간 퇴직연금사업자는 가입자를 유치하고 사업장을 관리하기 위해 영업조직과 상담인력, 전산시스템, 교육체계, 상품개발 및 사후관리망을 구축해야 합니다. 여기에 들어가는 비용은 결국 수수료와 사업비 등을 통해 회수해야 합니다. 반면 국민연금은 공적기관이라는 지위를 바탕으로 상대적으로 낮은 비용으로 시장에 접근할 가능성이 있고, 장기적으로 손실이 발생하더라도 민간회사와 같은 방식으로 시장에서 퇴출될 가능성은 낮습니다. 이런 주체가 수수료를 대폭 낮춰 시장에 진입한다면 그것이 효율성에 따른 가격 경쟁인지, 공적 지위에서 비롯된 사실상의 지원 효과인지 명확하게 구분하기 어려워질 수 있습니다.
기금형은 만들어 놓는다고 저절로 커지지 않는다
지난 9월 10일 한국퇴직연금개발원과 이데일리가 공동 개최한 제5차 퇴직연금혁신포럼에서는 기금형 도입의 성공 가능성과 국민연금의 퇴직연금 시장 참여라는 다소 별개의 주제가 함께 논의됐습니다. 발표자 가운데 한 명은 기금형 제도가 활성화될 것이며, 연합형 기금이 개방성을 확보하고 규모의 경제를 실현한다면 빠른 시간 안에 확산될 수 있다고 전망했습니다.
나아가 기금형 적립금이 2033년 1,000조원을 넘어 2040년에는 1,500조원에 도달해 국민연금과 함께 노후보장의 두 축으로 자리 잡을 것이라는 전망도 제시했습니다.하지만 이러한 전망에 앞서 보다 현실적인 질문을 던질 필요가 있습니다. 그 막대한 적립금을 누가, 어떤 경로를 통해, 어느 정도의 비용을 들여 확보할 것인가 하는 문제입니다.
기금형 제도는 수탁법인을 설립하고 전문가를 배치한다고 해서 자동으로 성장하는 구조가 아닙니다. 퇴직연금은 단순히 자금을 맡기는 금융상품이 아닙니다. 기업과 근로자에게 제도를 설명하고 가입을 설득해야 하며, 노사 간 의사결정을 지원하고 사업장별 제도와 투자성향을 분석해야 합니다. 이후에도 계좌 이전부터 퇴직급여 지급까지 지속적인 관리가 필요합니다. 특히 중소기업과 영세사업장은 전문인력과 재정 여력이 부족하기 때문에 별도의 교육과 컨설팅, 행정 지원까지 요구됩니다.
현재 계약형 시장은 은행·보험·증권회사 등 퇴직연금사업자들이 오랜 기간 구축해 온 영업 및 관리 채널을 통해 운영되고 있습니다. 따라서 기금형이 실제로 대규모 적립금을 확보하려면 기존 채널에 견줄 수 있는 유통·관리망을 구축해야 합니다. 사업장을 발굴할 조직부터 사용자와 근로자를 교육할 인력, 가입자 상담체계, 모바일·전산 플랫폼, 민원 및 지급관리 시스템까지 갖춰야 합니다. 이 모든 과정에는 상당한 초기 투자와 장기간의 운영비가 필요합니다.
더구나 연합형 기금은 복수의 사용자가 참여하는 구조이므로 사업장 확보가 성패를 좌우합니다. 기금의 투자성과가 아무리 좋더라도 가입자를 모집하지 못하면 규모의 경제는 발생하지 않습니다. 가입자와 사용자가 기존 계약형을 해지하고 새로운 기금으로 이동할 유인이 있는지, 이전 절차와 비용은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 계약 해지에 따른 이해관계는 어떻게 조정할 것인지도 해결해야 합니다. 따라서 “기금형은 활성화될 것”이라는 선언만으로는 부족합니다.
해외 사례의 핵심은 ‘누가’가 아니라 ‘왜'
토론에 참여한 한 전문가는 덴마크와 스웨덴을 사례로 들며, 해외 선진국에서도 공적기관이 사적연금이나 퇴직연금을 운용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국민연금의 참여가 세계적으로 유례없는 일은 아니라고 반박했습니다. 공공기관의 참여가 수수료를 획기적으로 낮출 수 있다는 주장도 제기됐습니다.
그러나 해외 사례는 기관의 존재 여부만이 아니라 참여 목적과 대상을 기준으로 비교해야 합니다. 덴마크와 스웨덴 등에서 공적 또는 준공적 기관이 사적연금 영역에 관여하는 경우에도 그 목적은 일반적으로 민간사업자와 시장점유율 경쟁을 벌이는 데 있지 않습니다. 민간시장이 포괄하지 못하는 저소득층과 취약계층, 영세사업장, 연금 사각지대를 보호하고 최소한의 노후소득 기반을 제공하는 것이 공공적 개입의 정당성입니다. 해외 공공연금의 시장 참여가 정당화된다면 그 이유는 공공기관이 더 높은 수익률을 내기 때문이 아니라 시장에서 배제된 사람을 보호하기 때문입니다. 공공기관이 민간 금융회사와 동일한 고객을 놓고 영업하고, 수수료와 상품으로 경쟁하며, 시장의 기준까지 설정한다면 이는 취약계층 보호 모델과는 다릅니다.
국민연금의 퇴직연금 시장 참여는 수익률 개선과 수수료 인하라는 명분을 내세우고 있습니다. 그러나 국민연금과 퇴직연금은 운용 목적과 자금 구조가 다르고, 국민연금공단은 민간 사업자와 동일한 조건에서 경쟁할 수 없습니다. 공적 지위를 활용한 시장 진입은 민간시장을 위축시키고, 공적연금에 대한 신뢰와 사적연금의 독립성을 동시에 훼손할 수 있습니다.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퇴직연금 시장의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이유로 국민연금이 시장에 진입하는 것은 개혁이 아닙니다. 그것은 공적연금의 권위를 사적연금 시장에 투입하는 시장 재편입니다. 퇴직연금에 필요한 것은 국민연금이라는 거대한 이름이 아니라, 가입자의 선택을 받기 위해 스스로 성과와 책임을 증명해야 하는 독립된 수탁자들입니다. 국민연금의 ‘메기 역할’은 폐기되어야 합니다. 그 자리는 공공기관의 시장 개입이 아니라, 기금형 제도 안에서 벌어지는 공정하고 다원적인 경쟁이 대신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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