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연금은 진정 선한 사마리아인인가?
퇴직연금 수익률 개선 명분 뒤 커지는 OCIO 진출과 시장 침해 논란
▶필자 소개
국민연금공단의 기금형 퇴직연금 참여를 둘러싼 논란이 결국 본질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처음 내세운 명분은 “낮은 퇴직연금 수익률을 개선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국민의 노후자산이 은행 예금성 상품에 묶여 낮은 수익률에 머무르고 있으니, 대규모 기금을 운용해 온 국민연금의 경험을 활용하자는 주장이었습니다. 겉으로만 보면 그럴듯한 이야기였습니다. 길가에 쓰러진 퇴직연금 가입자를 외면하지 않고 다가가는 ‘선한 사마리아인’처럼 보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지금 드러나는 그림은 전혀 다릅니다. 국민연금은 단순히 기금형 퇴직연금 제도가 안착하도록 돕는 조력자에 머물겠다는 것이 아니라, 기금형 퇴직연금 사업자 역할은 물론 외부위탁운용관리자, 즉 OCIO 역할까지 하겠다는 뜻을 내비치고 있습니다. 더 이상 구호 활동이라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정부와 노사정은 개인·기업별로 흩어진 퇴직연금을 하나로 묶어 전문가 집단이 운용하는 기금형 퇴직연금 도입을 추진하고 있습니다. 현행 퇴직연금이 계약형 구조 아래 낮은 수익률 문제를 안고 있다는 지적은 오래전부터 나온 이야기입니다. 실제로 최근 5년간 퇴직연금 수익률이 2%대에 머물렀다는 평가가 있는 반면, 국민연금은 장기적으로 더 높은 운용 성과를 보여왔다는 점에서 국민연금 참여론에 힘이 실렸습니다. 국민연금공단 역시 낮은 수수료와 높은 수익률을 내세우며, 자신들이 참여하면 국민에게 더 나은 성과를 돌려줄 수 있다고 주장해 왔습니다.
문제는 바로 그다음입니다. 낮은 수익률을 개선하겠다는 공익적 명분이 어느새 시장 진입의 논리로 바뀌고 있기 때문입니다. 국민연금이 기금형 퇴직연금의 수탁법인 역할을 하겠다는 수준을 넘어 OCIO 시장에도 참여하겠다는 것은 완전히 다른 차원의 문제입니다. OCIO는 단순히 돈을 굴리는 운용사가 아니라, 자산배분 전략을 짜고 포트폴리오를 관리하며 하위 운용사를 선정하고 평가하는 기금 운용의 총괄 지휘자입니다. 이 자리에 국민연금이 들어간다는 것은 민간 자산운용사와 증권사들이 경쟁하는 자본시장 한복판에 공적 연금기관이 직접 선수로 뛰어들겠다는 뜻이나 다름없습니다.
국민연금 선한 사마리아인인가, 시장 장악자인가, 시장교란자인가
선한 사마리아인의 핵심은 도움을 준 뒤 떠나는 데 있습니다. 쓰러진 사람을 구하고 길가의 부상자를 치료했을 뿐, 그 길을 통행하는 모든 사람의 주머니를 관리하겠다고 나서지는 않았습니다. 국민연금이 진정 선한 사마리아인이라면 퇴직연금 시장의 제도 개선을 돕고, 장기투자 원칙을 공유하며, 수수료 인하와 운용 투명성 제고를 압박하는 공적 기준 제시자로 머물러야 합니다.
그런데 작금의 국민연금의 행보는 다릅니다. “수익률을 높여 주겠다”는 선의의 언어를 앞세우더니, 결국 자신이 기금형 퇴직연금 사업자도 하고 OCIO도 하겠다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이는 공적 조력자의 역할을 넘어서는 일입니다. 시장을 보완하겠다던 기관이 오히려 시장의 핵심 플레이어가 되겠다고 선언한 셈입니다. 공익을 앞세운 진입이라 해도, 결과적으로는 자본시장 질서를 흔들 수 있는 행위입니다. 그래서 시장장악자 또는 시장교란자라는 비판을 면하기 어렵습니다.
국민연금의 OCIO 시장 진입이 특히 위험한 이유는 이해상충 때문입니다. 국민연금은 이미 국내 자본시장에서 막강한 위탁자입니다. 민간 운용사들에 자금을 맡기고, 그들의 성과를 평가하며, 선정 여부에까지 영향을 미치는 위치에 있습니다. 그런 기관이 이제는 같은 시장에서 민간 운용사와 경쟁하겠다고 나선 것입니다. 국민연금은 민간 운용사들의 전략, 성과, 조직 역량, 리스크 관리 체계에 관한 정보를 오랫동안 축적해 온 데다, 공적 기관이라는 브랜드와 신뢰까지 갖추고 있습니다. 민간회사와 같은 출발선에 서는 것 자체가 애초에 불가능한 이유입니다.
본업도 벅찬 국민연금이 왜 남의 시장까지 넘보나
더 근본적인 질문을 해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국민연금은 지금 자신의 본분을 다하고 있습니까?' 국민연금의 첫 번째 임무는 국민연금기금을 안정적으로 운용하고, 국민의 노후소득 보장이라는 공적 책무를 수행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한국 사회는 이미 국민연금의 지속가능성, 기금 고갈 우려, 보험료율과 소득대체율 조정, 세대 간 형평성 문제로 거대한 숙제를 안고 있습니다. 국민연금이 집중해야 할 전장은 바로 이곳입니다. 실제로 (사)한국고용복지학회가 지난해 9월 전국 퇴직연금 가입자 2,000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국민연금공단의 퇴직연금시장 참여를 반대하는 이유로 ‘운용 손실 발생 시 국민세금 부담 전가 위험’이 27.7%로 가장 높게 나타났습니다. 이어 ‘정부의 과도한 시장 개입 및 관치금융 우려’(20.2%), ‘나의 퇴직금을 내가 운용하지 못할 것 같아서’(17.1%) 순이었고, 거대자금력으로 인한 민간시장 독과점 및 고사 우려도 13.6%에 달했다는 점을 눈여겨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럼에도 국민연금이 퇴직연금 사업자와 OCIO 역할까지 하겠다고 나서는 것은 본분을 망각한 처사입니다. 국민연금은 국민이 맡긴 공적 노후자산을 관리하는 기관이지, 자본시장 내 신규 사업 기회를 찾아다니는 금융그룹이 아닙니다. 공적 연금기관이 자신의 운용 성과와 규모를 근거로 사적 시장의 사업자가 되겠다고 나서는 순간, 그 정체성은 흔들릴 수밖에 없습니다.
더구나 국민연금은 이미 막대한 자산을 민간에 위탁하고 있다는 점에서도 역설적입니다. 자체 운용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아 민간 운용사의 전문성을 활용해 온 기관이, 이제는 퇴직연금 OCIO 시장에서 민간 운용사를 지휘하고 경쟁하겠다고 나선 것입니다. 이는 논리적으로도 모순입니다. 민간의 전문성을 빌려 쓰던 기관이 어느 날 민간보다 자신이 더 잘할 수 있다며 시장의 총괄 운용자 자리를 요구하는 셈이기 때문입니다.
국민연금 참여론자들은 “민간과 직접 경쟁하지 않겠다”, “공공기관 중심으로 제한하겠다”, “요청이 있을 때만 하겠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공적 기관의 시장 진입은 한 번 문이 열리면 그 제한이 쉽게 무너지기 마련입니다. 처음에는 공공기관만, 다음에는 중소기업만, 그다음에는 연합형 기금 요청이 있을 때만, 그리고 결국에는 더 넓은 시장으로 확장될 수 있습니다. 공공기관의 선의는 늘 예외 조항에서 시작하지만, 시장에서는 그 예외가 곧 기준이 되곤 합니다.
선한 사마리아인은 도움을 주는 사람이지, 도움을 명분으로 마을의 상권을 접수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국민연금이 처음에는 퇴직연금 수익률 개선이라는 선한 사마리아인의 얼굴로 등장했다면, 이제는 그 가면을 벗고 자본시장 참여기관이 되겠다는 본색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이 황당한 행보를 그대로 방치한다면, 기금형 퇴직연금은 수익률 개선의 제도가 아니라 공적 거대기관의 시장 확장 통로로 변질될 수 있습니다.
국민연금은 국민의 노후를 지키라고 만들어진 기관입니다. 자본시장의 선수로 뛰라고 만들어진 기관이 아닙니다. 퇴직연금 시장을 고치겠다는 명분으로 자본시장 질서를 무너뜨리고, 민간의 경쟁 기반을 약화시키며, 본연의 책무까지 흐리는 일은 결코 공익이 될 수 없습니다. 국민연금은 지금이라도 선한 사마리아인의 본래 자리로 돌아가야 합니다. 도울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차지해서는 안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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