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퇴직연금은 평가를 받아야 하는가?
가입자 선택권 넓어지는 기금형 시대, 객관적 평가체계 마련해야
▶필자 소개
우리나라에 퇴직연금 기금형 제도가 도입되는 것은 거의 기정사실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기금형뿐만 아니라 계약형 사업자들의 관리와 감독을 전담할 호주의 건전성감독청(Australian Prudential Regulation Authority, APRA) 같은 전문 기관이 설립되기 어려운 상황이라면, 독립된 평가기관의 활성화는 무엇보다 필수적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한국 퇴직연금 시장, 왜 '평가'가 없었나
한국의 퇴직연금 시장은 도입 이후 20년 가까운 시간이 흘렀지만, 정작 시장의 신뢰를 담보할 '평가 인프라'는 사실상 부재했습니다. 그 이유는 단순합니다. 계약형 퇴직연금사업자(은행·보험·증권사 등)는 구조적으로 제대로 '평가할 대상'이 마땅치 않았기 때문입니다. 현재의 계약형 체제에서 퇴직연금사업자는 가입자의 자산을 직접 운용하지 않습니다. 사용자(기업)가 선택한 상품 라인업 안에서 가입자가 스스로 상품을 고르는 구조이며, 퇴직연금사업자는 어디까지나 관리와 운영 업무를 대행하는 역할에 머물러 있습니다. 즉, 실질적인 '수탁자로서의 자산운용 책임'이 사업자에게 온전히 부여되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러한 구조 속에서는 다음과 같은 이유로 평가가 사실상 큰 의미를 갖기 어려웠습니다.
✓운용 성과 귀속 주체의 불분명성: 최종 수익률은 가입자가 직접 고른 상품의 결과일 뿐, 사업자의 고유한 운용 역량과 직접 연결되지 않습니다.
✓수탁자책임(Fiduciary Duty)의 실질적 부재: '운용관리기관', '자산관리기관'이라는 명칭은 존재하지만, 호주식 수탁자(Trustee)처럼 가입자 이익을 위해 적극적으로 자산을 굴리고 책임지는 구조가 아닙니다.
✓평가 기준의 공백: 객관적으로 평가할 수 있는 대상이 '개별 상품(펀드)'에 국한될 뿐, '사업자의 종합적인 운용 역량'을 측정하기에는 태생적인 한계가 존재합니다.
기금형 도입이 바꾸는 것: '평가받아야 할 주체'의 탄생
그러나 기금형 퇴직연금 제도가 도입되면 이야기는 완전히 달라집니다. 기금형 수탁법인은 가입자를 대신하여 실질적인 자산운용 의사결정을 내리고, 그 결과에 대해 수탁자책임을 직접 부담하는 주체입니다. 호주의 Superannuation Fund가 그러하듯, 이제는 ‘누가 더 잘 운용하는가’, ‘누가 더 신뢰할 만한 지배구조를 갖췄는가’를 비교하고 평가할 수 있는 실체가 시장에 등장하게 됩니다.
이는 단순한 제도 변화를 넘어, 시장 구조 자체의 근본적인 전환을 의미합니다.
✓가입자 관점: 이제 여러 기금형 수탁법인 중 자신의 노후를 맡길 곳을 직접 선택해야 하는 입장에 놓이게 됩니다.
✓수탁법인 관점: 자신들의 뛰어난 운용 성과와 지배구조의 건전성을 시장에 대외적으로 증명해야 할 필요성이 생깁니다.
✓감독당국 관점: 급증하는 다수의 수탁법인을 효율적으로 관리하고 감독하기 위한 객관적이고 공정한 기준을 필요로 하게 됩니다.
이 세 가지 니즈가 동시에 폭발적으로 발생하는 시점이 바로 지금이며, 이는 과거 호주가 'Choice of Fund' 정책을 전면 도입한 이후 겪었던 것과 정확히 일치하는 궤적입니다.
평가 없는 선택권 확대는 '혼란'을 낳는다
호주의 사례가 우리에게 주는 가장 중요한 교훈은, 가입자에게 주어지는 선택권의 확대가 곧바로 시장의 효율성으로 이어지지는 않는다는 점입니다. 오히려 선택지가 늘어나는 순간, 공급자와 소비자인 가입자 사이의 정보 비대칭은 극대화될 수밖에 없습니다. 일반 가입자의 입장에서는 수십 개에 달하는 기금형 수탁법인의 복잡한 운용 성과와 수수료 구조, 그리고 지배구조의 건전성까지 스스로 비교하고 판단할 전문적인 능력도, 충분한 시간도 부족합니다.
이때 우리에게 절실히 필요한 것이 바로 '신뢰도 높은 제3자 평가기관'입니다. 호주는 이 정보의 공백을 Chant West의 '사과 등급'과 같은 직관적인 B2C 정보, SuperRatings의 '플래티넘 등급'과 같은 B2B 품질 인증, 그리고 Rainmaker의 방대한 데이터 인프라를 통해 훌륭하게 메워냈습니다.
이 세 가지 핵심 기능은 각기 독립적으로 발전했지만, 결과적으로는 시장 전체의 신뢰를 형성한다는 공동의 목표를 성공적으로 달성했습니다.
평가는 감독의 보완재이자 시장 자율규제의 핵심
여기서 특별히 강조해야 할 점은, 평가기관의 역할이 단순히 '정보를 제공해 주는 곳'에 머물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호주에서 SuperRatings의 플래티넘 등급이 사실상 업계의 공인된 표준으로 기능했던 것처럼, 민간 평가기관은 정부의 감독 기능을 단순히 대체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정부의 손길이 미치지 못하는 곳을 보완하고, 시장 참여자들 스스로 건전한 규율과 경쟁력을 갖추도록 유도하는 강력한 촉매 역할을 합니다.
한국의 기금형 수탁법인 역시 도입 초기부터 정부의 직접적인 감독만으로는 촘촘하고 세밀한 관리에 한계가 따를 수밖에 없습니다. 수탁법인의 수가 늘어나고 운용 전략 또한 다양화될수록, 감독당국이 모든 영역을 상시적이고 세밀하게 모니터링하기란 현실적으로 어렵기 때문입니다.
이때 민간 평가기관이 상시적으로 축적한 방대한 데이터와 전문적인 평가 결과는 감독당국에게도 매우 유용한 참고 자료가 되며, 나아가 향후 정부 위탁 평가기관으로서의 공적 역할까지 톡톡히 수행할 수 있는 충분한 잠재력을 갖추게 됩니다.
평가는 계약형으로 확대 필요
앞서 지적했듯이 계약형은 평가라는 잣대에서 한 발짝 떨어져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기금형과 계약형이 경쟁하는 구조가 마련되면, 계약형 사업자 스스로 객관적이고 공정한 전문 평가사의 평가 결과를 고객들에게 적극적으로 알릴 필요가 있습니다.
그 이유는 첫째, 상품 선정·제시 및 가입자 교육 의무의 충실성 검증입니다. 계약형 사업자는 가입자에게 적합한 상품을 선정·제시하고 교육을 제공해야 할 법적 의무가 있으나, 이해관계 상품 위주 추천이나 형식적 교육의 유인이 존재합니다. 평가 법제화를 통해 선정 적정성, 교육 충실성, 정보 정확성을 점검하여 의무 이행을 강제할 수 있습니다.
둘째, 정보 비대칭 해소와 가입자의 합리적 선택권 보장입니다. 가입자는 계약형 사업자의 서비스 품질이나 수수료 체계를 알기 어렵습니다. 평가 결과를 표준화·공시하면 사용자와 근로자가 서비스 품질을 비교하여 합리적인 사업자 선택 및 교체를 할 수 있게 됩니다.
셋째, 이해상충 구조에 대한 규율 실효성 확보입니다. 계약형 사업자는 적립금 관리자이면서 동시에 상품을 매개하는 이해상충 구조를 지닙니다. 법제화된 평가로 가입자 이익 우선 원칙 준수 여부, 자사 상품 편향 판매, 수수료 적정성 등을 정기 점검하고, 법적 실효성을 부여해 신의성실 의무를 강제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고객 최선 이익을 위한 현명한 방법이 되도록 법의 재정비가 필요합니다.
결국, 그동안 한국 퇴직연금 시장에서 평가 사업이 활성화되지 못했던 원인은 시장의 무관심 때문이 아니라, 계약형 구조 속에서 제대로 평가할 만한 실질적인 대상 자체가 부재했기 때문이라는 점을 분명히 인식해야 합니다.
따라서 앞으로 기금형 제도가 도입되는 초기 단계에서부터 평가 기능을 선제적으로 면밀히 설계하고, 이를 시장에 안정적으로 안착시키기 위한 제도적 노력이 무엇보다 절실하다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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