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연금의 퇴직연금시장 진출, 지금은 절대 안 된다
퇴직연금 진출보다 먼저 따져야 할 운용 독립성과 수탁자 책임
▶필자 소개
국민연금의 퇴직연금시장 진출 논의는 최근에 처음 등장한 것은 아닙니다. 문재인 정부 시절인 2018년부터 현재 약 8.3% 수준인 퇴직연금 기여분 가운데 3%포인트를 국민연금으로 편입해 국민연금의 소득대체율을 높이고, 보험료율 인상에 따른 부담을 줄이자는 방안이 제기되어 왔습니다. 최근에는 국민연금의 규모와 낮은 운용수수료, 장기투자 역량, 공적기관으로서의 신뢰 등을 바탕으로 퇴직연금의 수익률을 높일 수 있다는 주장도 나오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에 앞서 반드시 짚어봐야 할 중요한 전제가 있습니다. 퇴직연금의 일정 부분을 국민연금에 기여하는 방안을 논의하든, 국민연금의 신뢰도를 근거로 퇴직연금시장 진출을 주장하든, 무엇보다 우선되어야 할 것은 적립금 운용 원칙의 독립성과 가입자 이익에 대한 충실의무에 있다는 것입니다.
같은 시장, 달랐던 리밸런싱
최근 국내 주식시장의 급등과 급락 국면에서 나타난 국민연금의 행보는 이 점에서 심각한 경고를 보내고 있습니다. 반면 사학연금과 공무원연금은 사전에 정한 전략적 자산배분(SAA)과 허용범위에 따라 국내 주식 비중을 조절했습니다. 주가가 급등해 국내 주식 비중이 목표 범위를 넘어서자 단계적으로 매도해 이익을 확정했고, 이후 시장이 급락했을 때 다시 매수할 수 있는 여력도 확보했습니다. 사전에 정해진 자산배분 원칙을 충실히 따른 교과서적인 운용이었습니다.
반면 국민연금은 국내 주식 비중이 전략적 자산배분 허용범위를 넘어선 상황에서도 기계적 리밸런싱을 유예했습니다. 이후에는 목표 비중과 허용범위를 상향 조정해 국내 주식을 더 보유할 수 있는 여지까지 넓혔습니다.
그 결과 상반기 고점 구간에서 위험자산 비중을 줄이고 수익을 확정할 기회를 상당 부분 놓쳤고, 7월 시장 급락 국면에서는 그동안 쌓인 평가이익의 일부를 반납해야 했습니다. 언론에서 제기된 약 180조 원 규모의 손실 또는 손실 회피 기회를 놓쳤다는 주장은 단순히 운용 성과만의 문제로 볼 수 없습니다. 기금운용의 통제체계와 책임구조가 제대로 작동했는지를 따져봐야 할 사안입니다.
자산배분 원칙은 왜 중요한가
전략적 자산배분은 단순한 숫자 놀음이 아닙니다. 가입자의 노후자산을 지키기 위한 ‘헌법’과도 같은 운용 규율입니다. 주식시장이 급등하면 주식 비중은 자연스럽게 커지고, 그만큼 포트폴리오 전체의 위험도 높아집니다. 이때 초과된 주식 비중을 일부 줄이고 상대적으로 비중이 낮아진 채권·해외자산·대체자산 등으로 옮기는 것은 시장 전망에 베팅하는 것이 아니라, 포트폴리오의 위험을 사전에 정한 수준으로 되돌리는 과정입니다. 반대로 주식시장이 급락하면 정해진 범위 안에서 주식을 다시 사들여 장기적인 기대수익을 확보합니다. 이러한 과정을 ‘리밸런싱’이라고 합니다.
사학연금과 공무원연금이 보여준 것이 바로 이러한 원칙입니다. 상승장에서는 ‘더 오를 것’이라는 기대에 흔들리지 않고 일부를 매도했고, 하락장에서는 ‘더 떨어질 것’이라는 우려에 휘둘리지 않으면서 매수 여력을 유지했습니다. 이들은 시장 전망이 아니라 IPS(투자정책서)와 자산배분 원칙에 따라 움직였습니다. 운용 성과는 단기적으로 엇갈릴 수 있습니다. 하지만 가입자의 자산을 맡은 기관이 지켜야 할 기본은 시장 상황과 관계없이 사전에 정한 원칙을 일관되게 지키는 데 있습니다.
더 큰 문제는 ‘운용의 독립성’
국민연금의 문제는 이러한 원칙이 정치적 환경에 따라 흔들릴 수 있다는 의구심을 낳았다는 데 있습니다. 국민연금은 국내 주식시장에서 막대한 영향력을 가진 ‘큰손’입니다. 그만큼 국민연금의 매도는 증시의 하락 압력으로, 매수는 시장을 떠받치는 신호로 받아들여지기도 합니다. 정치권과 정부가 증시 상황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현실에서 국민연금이 시장 안정이나 정책적 목표를 이유로 자산배분 원칙을 유연하게 적용한다면, 가입자를 위한 장기투자자라는 본래의 역할에서 벗어나 정책 목적을 위한 시장 참여자로 변질될 위험이 있습니다.
이에 따른 법적·도덕적 책임도 결코 가볍지 않습니다. 연기금 운용에서 가장 우선되어야 할 원칙은 가입자와 수급자의 이익입니다. 기금운용자는 자신에게 맡겨진 자산을 선량한 관리자의 주의를 다해 운용해야 하며, 정치적 고려나 시장 부양을 목적으로 가입자의 위험 노출을 확대해서는 안 됩니다. 특히 자산배분 기준을 사후적으로 변경하거나 초과 비중 상태를 장기간 용인하는 방식으로 사실상 리밸런싱을 회피했다면, 그러한 결정이 어떤 근거와 절차에 따라 이루어졌는지 엄격하게 검증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런 상태에서 퇴직연금까지 맡길 수 있나
이러한 상황에서 국민연금의 퇴직연금시장 진출을 논의하는 것은 매우 성급하고 위험한 접근일 수 있습니다. 퇴직연금은 국민연금과 그 성격이 다릅니다. 국민연금은 강제가입을 기반으로 한 공적연금인 반면, 퇴직연금은 개별 근로자와 기업이 적립한 노후자산으로 운용 성과와 손실을 가입자가 훨씬 직접적으로 체감하게 됩니다. 따라서 가입자는 자신의 퇴직자산이 어떤 원칙과 절차에 따라 운용되는지, 누가 의사결정을 내리는지, 그 과정에 외부 압력이 개입할 여지는 없는지 확인할 권리가 있습니다.
퇴직연금 운용기관에는 무엇보다 명확한 수탁자 책임이 요구됩니다. 가입자의 이익을 최우선으로 자산을 배분하고, 사전에 정한 투자정책을 일관되게 집행하며, 정치·행정·산업정책의 요구로부터도 독립성을 유지해야 합니다. 그런데 국민연금조차 국내 주식 리밸런싱 과정에서 정치적 압력과 시장 부양 논란에서 자유롭지 못했다면, 과연 퇴직연금 가입자들에게 적립된 자산이 정치적 고려와 철저히 분리돼 운용될 것이라고 약속할 수 있을까요?
규모보다 먼저 증명해야 할 것은 원칙
국민연금의 퇴직연금시장 참여는 단순히 새로운 운용사업 하나를 추가하는 차원의 문제가 아닙니다. 이미 국민연금은 국내 금융시장과 자본시장에서 막대한 영향력을 갖고 있습니다. 여기에 퇴직연금 자금까지 국민연금 체계나 그 영향권으로 집중된다면, 국내 금융시장에서 공적자금의 집중도는 더욱 높아질 수밖에 없습니다. 이는 시장의 경쟁을 약화시키고 민간 운용산업의 혁신을 저해할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정책적 개입이 발생할 경우 그에 따른 영향과 피해 규모가 훨씬 커질 위험도 있습니다.
국민연금의 퇴직연금시장 진출은 허용되어서는 안 됩니다. 국민연금이 ‘큰 기관이니 더 잘할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만으로 국민의 노후자산을 추가로 맡기는 것은 무책임한 접근입니다. 연금 운용의 핵심은 규모가 아니라 원칙이며, 수익률에 앞서 검증되어야 할 것은 운용의 독립성입니다.
국민연금은 무엇보다 제 앞가림부터 해야 합니다. 정치권의 눈치를 보느라 리밸런싱을 멈추고 가입자의 위험을 키울 수 있는 구조가 남아 있는 한, 국민연금에 퇴직연금까지 맡기는 것은 노후자산의 안전판을 넓히는 일이 아니라 위험의 집중도를 높이는 일입니다. 퇴직연금시장 진출 논의의 결론은 분명합니다. 국민연금이 운용의 독립성과 수탁자 책임을 행동으로 증명하기 전까지, 국민연금의 퇴직연금시장 진출은 허용되어서는 안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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