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연금, 퇴직연금 시장에 앞서 스스로의 신뢰부터 회복하라
퇴직연금 확장보다 급선무는 본연의 신뢰와 정치적 독립성 회복
▶필자 소개
국민연금은 국민의 노후를 지키는 최후의 보루입니다. 여기에 시시비비를 따질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이런 국민연금이 근자에 들어 퇴직연금의 기금형 제도에 참여해 더 높은 수익률을 제공하겠다는 입장을 적극적으로 내놓고 있습니다. 핵심 취지는 이렇습니다. 세계 3대 국민연금의 규모, 글로벌 투자 경험, 장기투자 역량을 민간 퇴직연금에 접목하면 퇴직연금의 현재보다 3배 이상의 수익을 올릴 수 있고, 3분의 1의 비용으로 운용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현재 벌어지고 있는 국민연금 관련 여러 이슈를 되짚어 보면, 지금 국민연금에 필요한 것은 퇴직연금으로의 사업 영역 확장이 아니라 본연의 책무에 대한 철저한 성찰과 혁신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 이유는 국민의 노후를 책임지는 공적 연금기관이 정작 제도 설계의 불공정, 관리 사각지대, 정치적 압력에 대한 취약성을 해소하지 못한 채 민간의 퇴직연금 시장까지 들어가겠다고 나서는 것은 순서가 뒤바뀌어도 한참 뒤바뀐 일이기 때문입니다.
최근 드러난 두 사례는 국민연금이 왜 먼저 자기 혁신에 집중해야 하는지를 선명하게 보여 줍니다. 하나는 성실하게 국민연금 보험료를 낸 사람의 기초연금이 감액되는 문제이고, 다른 하나는 추후 납부 제도가 외국인의 기만적 연금 수급 자격을 만드는 통로처럼 활용될 수 있다는 논란입니다. 전자는 성실 납부자의 신뢰를 훼손하고, 후자는 제도의 형평성과 기금 관리의 엄정성을 의심하게 합니다. 이 두 문제를 방치한 채 “국민연금의 운용수익률이 좋으니 퇴직연금도 맡겨 달라”고 말하는 것은 국민이 납득하기 어려운 자기모순입니다.
성실 납부자를 벌하는 연금제도라면 신뢰를 말할 자격이 없다
국민연금은 국가 사회보험입니다. 가입자가 보험료를 납부하고, 그 기여에 따라 노후소득을 보장받는다는 약속 위에 서 있습니다. 반면 기초연금은 세금을 재원으로 하여 일정 소득·재산 기준을 충족한 고령층의 최소 생활을 보장하는 제도입니다. 양 제도는 목적과 재원이 다르며, 따라서 역할도 명확히 구분돼야 합니다. 그런데 현실에서는 국민연금을 오래 납부하고 더 많이 받을수록 기초연금이 줄어들 수 있는 ‘국민연금 연계 감액’이 작동합니다. 지난해 말 기준 이 제도로 감액된 기초연금 총액은 약 804억원에 이르렀고, 감액 대상자는 약 84만명으로 늘었습니다. 2021년의 약 39만명과 비교하면 두 배 이상입니다. 국민연금을 성실히 납부해 자신의 노후소득을 늘리려 한 사람이 정작 그 노력의 일부를 기초연금 감액으로 돌려받는 셈입니다.
물론 기초연금을 소득 하위 계층에 집중해야 한다는 정책적 논리는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제도가 국민에게 보내는 신호입니다. “더 오래, 더 성실히 보험료를 내라”고 해 놓고, 그 결과로 확보한 연금소득이 다른 공적 급여의 삭감 요인이 된다면 누가 제도를 신뢰할 수 있을까요? 국민연금의 가입 유인을 스스로 훼손하는 설계입니다.
추후납부의 허점은 '기금 운영' 이전에 '제도 관리'의 문제다
외국인의 국민연금 추후납부 사례도 가볍게 볼 일은 아닙니다. 보도에 따르면 국내에서 단 1개월 가입한 뒤 과거 기간에 대한 보험료를 한꺼번에 추후 납부해 10년 가입 요건을 채우고, 이후 노령연금을 받는 사례들이 확인됐습니다. 일부는 해외에 거주하면서 연금을 수령하는 것으로 보도됐습니다. 핵심은 외국인이라는 신분 자체가 아닙니다. 대한민국에서 일하고 보험료를 납부하며 법이 정한 요건을 충족한 외국인의 사회보장권은 당연히 존중되어야 합니다. 문제는 제도의 목적과 실제 운용 사이에 생긴 틈입니다.
추후납부 제도는 실직·사업 중단·경력단절 등으로 보험료 납부가 끊긴 국민의 노후소득 공백을 보완하기 위해 도입됐습니다. 그런데 가입 이력과 체류 자격, 가족관계, 무소득 기간을 정밀하게 검증하기 어려운 환경에서 수급 요건을 단기간에 충족하는 경로로 활용된다면, 이는 제도 설계와 사후관리의 실패입니다. 우리 국민이 오랜 기간 납부해 조성한 국민연금 재원이 실제 가입 기간은 한 달 남짓에 불과한 외국인의 연금 수급에 활용되는 상황이라면, 제도의 형평성과 기금 관리 측면에서 엄격하게 따져볼 필요가 있습니다.
“수익률이 좋다”는 주장, 냉정하게 분해해야 한다
국민연금은 높은 투자수익률을 내세워 퇴직연금 기금형 참여의 당위성을 주장하는 측면이 강합니다. 그러나 연기금 수익률은 단일한 숫자로 평가할 수 없습니다. 특히 단기 수익률을 근거로 기관 고유의 운용능력이 탁월하다고 결론 내리는 것은 위험합니다. 국민연금의 수익률에는 세계 주식시장과 채권시장, 환율, 대체투자 가격 변동 등 거시적 시장 환경이 크게 반영됩니다. 글로벌 주식시장이 상승하고 원화 가치가 약세를 보이면 해외자산 비중이 큰 장기기금은 상대적으로 높은 수익률을 기록할 수 있습니다. 이는 일정 부분 자산배분과 투자 실행의 결과일 수 있지만, 동시에 세계 자본시장의 흐름에 편승한 결과이기도 합니다. 시장의 순풍과 운용 실력을 구분하지 않은 채 “우리가 잘했으니 다른 사람의 노후자금도 맡겨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과장에 가깝습니다.
정말 운용역량을 입증하려면 다음과 같은 질문에 투명하게 답해야 합니다.
첫째, 동일한 위험을 감수한 다른 대형 연기금과 비교해 장기 초과수익을 냈습니까.
둘째, 시장 상승기뿐 아니라 하락기와 위기 국면에서도 손실 관리 능력을 보였습니까.
셋째, 수익률이 단순한 주식·환율 베타가 아니라 일관된 자산배분·종목선정·위험관리에서 비롯됐습니까.
넷째, 대체투자의 평가 방식과 수수료, 유동성 위험, 손상 가능성은 충분히 공개되고 있습니까.
다섯째, 투자 의사결정은 정치권·정부·이해관계자의 압력으로부터 실질적으로 독립되어 있습니까.
퇴직연금은 국민연금과 다릅니다. 국민연금은 강제가입을 기반으로 한 공적 사회보험이고, 퇴직연금은 근로자의 임금 후불분이자 노후자산입니다. 퇴직연금 기금형 제도에 국민연금이 참여한다는 것은 단순히 운용 규모를 키우는 문제가 아닙니다. 공적 기관이 민간 퇴직자산 시장에서 사실상 거대 플레이어가 되는 일이며, 그만큼 경쟁 중립성과 책임 소재, 손실 발생 시의 부담 구조를 엄격하게 따져야 합니다.
정치에서 독립하지 못한 기금에 더 많은 돈을 맡길 수 없다
국민연금의 가장 큰 구조적 위험 가운데 하나는 정치적 압력입니다. 보험료율, 소득대체율, 지급 개시연령, 기초연금과의 관계, 국내투자 확대 요구, 특정 산업 지원 논리 등 국민연금은 늘 정치의 중심에 놓여 있습니다. 국민의 노후와 직결된 제도인 만큼 정책과 정치의 영향을 완전히 피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정치가 기금 운용의 전문성과 장기성을 침범해서는 안 됩니다. 만약 국민연금이 퇴직연금제도에 참여해 막대한 기금을 운용할 때 정부의 입김이 지금처럼 작용한다고 의심받는다면 정말 큰일이 벌어질 수 있습니다.
국민연금은 영국의 NEST(국가퇴직연금신탁)나 스웨덴의 AP7을 벤치마킹해 퇴직연금 시장에 진출하려 합니다. 그러나 이들 국가의 공적 기관 참여는 영세 기업 근로자의 사각지대를 해소하기 위한 ‘보완재’ 역할이거나, 철저하게 독립된 지배구조 아래에서 민간과 공정하게 경쟁하는 시스템입니다. 반면 우리의 국민연금은 여전히 보험료율과 소득대체율 조정조차 정치적 외풍에 흔들리는 구조적 한계를 안고 있습니다.
OECD는 각 국가에 3층 연금제도 확충을 요구하며, 각 층의 연금은 고유의 역할이 있다고 강조합니다. 국민연금이 1층 공적연금으로서의 신뢰, 즉 기초연금 감액의 모순과 추후납부 제도의 허점 등을 해소하고 정치적 독립성을 확립하지 못한 상태에서 해외 사례의 껍데기만 빌려와 2층 퇴직연금 시장의 거대 플레이어가 되겠다는 것은 본말이 전도된 것입니다. 국민연금이 왜 퇴직연금 시장에 진출하려 하는지, 그 이면에 기금 고갈에 대한 불안감을 다른 주머니로 채우려는 조급함은 없는지 냉정하게 따져봐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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