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급 오르면 저축 늘릴게요”…그 약속, 정말 지켜질까?
Thaler와 Benartzi의 ‘Save More Tomorrow’가 알려주는 연금저축의 비밀
▶필자 소개
직장 생활을 하다 보면 한 번쯤 이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
“지금은 생활비가 빠듯하지만, 월급이 조금만 더 오르면 연금저축 납입액을 늘려야지.”
하지만 막상 월급이 오르면 상황이 달라집니다. 사고 싶었던 물건이 눈에 들어오고, 가족과의 외식도 늘어납니다. 결국 늘어난 월급은 어느새 각종 지출로 사라지고, 연금저축 납입액은 그대로입니다. 그러고는 다시 다짐합니다.
“다음에 월급이 오르면 그때는 정말 저축을 늘려야지.”
이러한 일이 반복되는 이유는 단순히 우리의 의지가 부족하기 때문일까요?
2017년 노벨경제학상을 받은 리처드 탈러 교수와 공동 연구자인 슐로모 베나르치 교수는 사람들이 노후를 위해 충분히 저축하지 못하는 이유를 인간의 행동 특성에서 찾았습니다. 그리고 이를 보완할 수 있는 흥미로운 해결책을 제시했습니다. 당장 저축액을 늘리도록 요구하는 대신, 앞으로 월급이 오를 때 인상분의 일부를 노후 저축에 배분하겠다고 미리 약속하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2004년 《Journal of Political Economy》에 게재된 논문 ¹「Save More Tomorrow: Using Behavioral Economics to Increase Employee Saving」에서 제안한 ‘SMarT(Save More Tomorrow) 프로그램’의 핵심입니다.
“더 저축해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왜 행동하지 않을까?
전통적인 경제학에서는 개인이 소득과 소비, 노후에 필요한 자금을 합리적으로 계산해 적정 금액을 스스로 저축한다고 봅니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노후에 얼마가 필요할지 계산하는 것부터 쉽지 않고, 저축이 부족하다는 사실을 알아도 당장의 소비를 줄여 저축액을 늘리기는 어렵습니다.
탈러와 베나르치는 사람들이 충분히 저축하지 못하는 이유를 행동경제학에서 설명하는 심리적 특성에서 찾았습니다.
현재편향(Present Bias):
미래에 얻을 큰 이익보다 당장의 소비에서 얻는 만족을 더 크게 평가하는 경향입니다. 안정된 노후는 수십 년 뒤의 일이지만, 오늘의 외식은 즉각적인 즐거움을 줍니다. 그 결과 미래의 자신을 위한 저축보다 현재의 소비를 우선하기 쉽습니다.
손실회피(Loss Aversion):
사람들은 같은 크기의 이익보다 손실에 더 민감하게 반응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미 익숙해진 생활수준에서 지출을 줄이는 것은 단순한 소비 조정이 아니라, 생활수준이 낮아지는 손실처럼 느껴질 수 있습니다.
따라서 현재 월급에서 연금저축 납입액을 바로 늘리면 당장 사용할 수 있는 돈이 줄어든다고 받아들여 저항감을 느끼기 쉽습니다. SMarT 프로그램이 현재의 월급에서 저축액을 바로 늘리는 대신, 월급이 오르는 시점에 저축률도 함께 높이도록 설계된 이유입니다.
미루기(Procrastination)와 관성(Inertia):
“다음 달부터 해야지”라고 결정을 미루다 보면 결국 아무것도 바꾸지 않은 채 기존 상태를 유지하게 됩니다.
논문이 인용한 선행연구에 따르면, 자신이 충분히 저축하지 못하고 있다고 응답한 사람 가운데 35%는 몇 달 안에 저축률을 높이겠다고 답했습니다. 그러나 4개월 뒤 이들 중 86%는 실제 저축계획을 바꾸지 않았습니다. 저축을 늘려야 한다는 생각이 있어도, 이를 행동으로 옮기지 못하고 기존 상태에 머무른 것입니다.
해결책: "오늘의 나 말고, '미래의 나'에게 저축을 맡겨라"
그렇다면 이러한 심리적 장애물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까요? SMarT 프로그램의 설계는 의외로 간단합니다. 오늘의 나에게 당장 희생을 요구하지 않는 것입니다.
SMarT 프로그램은 다음 4가지 방식으로 작동합니다.
미리 약속하기:
저축을 늘리는 결정은 지금 내리지만, 실제 저축률 인상은 다음 임금 인상 시점부터 시작합니다.
월급 인상분 활용하기:
임금이 오를 때 저축액을 함께 늘립니다. 기존 생활수준을 줄이지 않고도 저축을 늘릴 수 있다는 점을 활용합니다.
자동으로 증액하기:
한 번 약속하면 이후 임금이 오를 때마다 저축률이 미리 정한 한도까지 자동으로 높아지도록 합니다.
언제든 중단할 수 있게 하기:
가입자는 원하면 언제든 프로그램에서 빠져나올 수 있습니다. 이러한 선택권은 프로그램 가입에 대한 심리적 부담을 낮추는 역할을 합니다.
예를 들어 세후 월급 400만 원 가운데 5%인 20만 원을 저축하는 직장인이 있다고 가정해보겠습니다. 이때 소비에 사용할 수 있는 돈은 380만 원입니다. 당장 저축액을 40만 원으로 늘리면 소비할 수 있는 돈은 360만 원으로 20만 원 줄어들기 때문에 상당한 저항감을 느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월급이 420만 원으로 올랐을 때 인상분 20만 원의 절반인 10만 원을 추가로 저축하면 어떨까요? 저축액은 20만 원에서 30만 원으로 늘어나지만, 소비에 사용할 수 있는 돈도 380만 원에서 390만 원으로 증가합니다. 기존 생활수준을 줄이지 않으면서 저축액과 소비 가능한 금액을 함께 늘릴 수 있는 것입니다.
현재의 생활수준을 낮추지 않으면서 미래를 위한 저축을 늘리는 것입니다. 바로 이 점이 SMarT 프로그램의 핵심입니다. 탈러와 베나르치는 임금이 인상되는 시점을 저축을 늘리기에 적절한 때로 보았습니다. 기존에 소비할 수 있던 금액을 줄이는 것이 아니라, 새롭게 늘어난 소득의 일부를 저축하기 때문에 손실로 느낄 가능성이 작기 때문입니다.
저축률을 4배 가까이 높인 SMaT의 실제 사례
탈러와 베나르치는 한 기업의 임직원들을 대상으로 SMarT 프로그램을 실제로 적용했습니다. 결과는 상당히 인상적이었습니다
높은 참여율:
SMarT 프로그램을 제안받은 직원의 78%가 가입했습니다.
높은 유지율:
가입자의 80%가 네 차례의 임금 인상까지 프로그램을 유지했습니다.
저축률 약 3.9배 증가:
프로그램 참여자들의 평균 저축률은 3.5%에서 시작해 40개월 후 13.6%까지 높아졌습니다.
특히 흥미로운 점은 프로그램에서 중도 이탈한 사람들조차 저축률을 원래 수준으로 되돌리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들은 앞으로 예정된 저축률 인상만 중단했을 뿐, 이미 높아진 저축률은 그대로 유지했습니다. 이는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시사합니다. 사람의 저축 의지를 바꾸려고 하기보다 저축을 늘리기 쉬운 환경을 만들어주는 것이 더 효과적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연금설계의 핵심: 의지가 아닌 ‘시스템’
우리는 흔히 노후 준비가 부족하면 개인의 금융지식이나 의지 부족을 탓합니다. “연금 공부를 하세요.” “더 아껴 쓰세요.” “노후를 위해 더 많이 저축하세요.” 물론 금융지식은 중요합니다. 하지만 알고 있는 것과 실제로 행동하는 것은 다릅니다.
SMarT가 던지는 중요한 메시지는 여기에 있습니다. 사람의 의지를 바꾸기 어렵다면, 사람의 행동이 바뀌도록 시스템을 설계하면 어떨까요? 좋은 연금제도는 강한 의지를 가진 사람만 성공할 수 있는 제도가 아니라, 의지가 약하거나 바쁜 사람도 자연스럽게 노후 준비를 이어갈 수 있도록 설계된 제도일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도 확정기여형(DC) 퇴직연금과 개인형퇴직연금(IRP) 가입자가 운용지시를 하지 않을 경우, 사전에 정한 방법으로 적립금을 운용하는 디폴트옵션(사전지정운용제도)이 시행되고 있습니다. SMarT가 보여준 ‘의지보다 시스템’이라는 관점은 이러한 연금제도를 바라보는 데에도 중요한 시사점을 줍니다.
연금을 준비한다는 것은 결국 현재의 소득 일부를 미래의 나에게 보내는 일입니다. 그런데 오늘의 나는 미래의 나보다 목소리가 큽니다. 오늘 맛있는 것을 먹고 싶고, 사고 싶은 물건도 사고 싶습니다. 그래서 미래를 위한 저축은 자꾸 내일로 미뤄집니다.
SMarT가 가르쳐주는 교훈은 의외로 단순합니다. 미래의 나를 위해 오늘의 나에게 무조건 희생을 요구할 필요는 없습니다. 대신 월급이 오를 때 늘어난 소득의 일부를 미래의 나를 위해 자동으로 저축하도록 미리 약속해 두면 됩니다.
노후 준비의 첫걸음은 결연한 의지를 다지는 데 있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나의 약점을 인정하고, 이를 보완해 줄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드는 것이 오히려 더 중요한 출발점일 수 있습니다.
¹Richard H. Thaler·Shlomo Benartzi(2004), 「Save More Tomorrow™: Using Behavioral Economics to Increase Employee Saving」, 『Journal of Political Economy』, Vol. 112, No. S1, pp. S164–S1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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