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직연금 ‘머니무브’ 본격화…IRP·DC는 증권사로, DB는 은행·보험사로
실물이전 1년 8개월 만에 15.9조원…증권업권 4.15조원 순유입
퇴직연금 실물이전 제도가 시행된 지 1년 8개월 만에 약 16조 원의 자금이 움직였다. 특히 은행에서 증권사로 이동한 자금이 5조 원을 넘어서면서 퇴직연금 시장에서 업권 간 ‘머니무브’가 본격화되고 있다. 개인이 직접 운용에 참여하는 IRP와 DC형에서는 증권사로 자금이 몰린 반면, DB형에서는 은행과 보험사가 우위를 보였다. 퇴직연금 제도에 따라 금융회사 선택이 뚜렷하게 갈리는 모습이다.
지난 24일 금융감독원 발표에 따르면 퇴직연금 실물이전 서비스가 시작된 2024년 10월 31일부터 올해 6월 말까지 누적 이전 금액은 15조 8699억 원, 이전 건수는 약 24만 8000건에 달했다. 하루 평균 261억 원, 409건의 퇴직연금 계좌가 이동한 셈이다.
실물이전은 가입자가 기존 퇴직연금 계좌에서 보유하던 상품을 매도하거나 해지하지 않은 채 금융회사만 바꿀 수 있도록 한 제도다. 과거에는 사업자를 변경하려면 기존 상품을 현금화해야 해 중도해지에 따른 불이익이나 재투자 과정에서 발생하는 시장 변동 위험을 감수해야 했다. 실물이전이 도입되면서 이런 장벽이 낮아졌고 금융회사 간 경쟁도 한층 직접적으로 이뤄지게 됐다.
올해 들어 이동 속도 두 배로 빨라져
주목할 부분은 최근 실물이전 속도가 빠르게 증가하고 있다는 점이다. 반기별 이전 금액은 제도가 도입된 2024년 하반기 1조 9000억 원에서 2025년 상반기 3조 2000억 원, 하반기 3조 8000억 원으로 증가했다. 올해 상반기에는 6조 9000억 원으로 뛰었다. 전년 같은 기간의 두 배가 넘는 규모다. 퇴직연금 가입자들이 과거보다 적극적으로 금융회사를 비교하고 계좌를 옮기기 시작했다는 의미로 볼 수 있다. 퇴직연금 시장에서 금융회사를 한 번 선택하면 장기간 그대로 유지하는 이른바 ‘잠금 효과’가 약해지고 있는 셈이다. 자금의 방향은 더 흥미롭다. 금감원 자료에 따르면 전체 실물이전 15조 8699억 원 가운데 은행에서 증권사로 옮겨간 자금은 5조 2225억 원으로 전체의 약 33%를 차지했다. 업권 간 이동 가운데 가장 큰 규모다. 은행에서 은행으로 이동한 금액도 4조 4817억 원으로 약 28%를 차지했다.
반대 방향의 이동은 상대적으로 작았다. 증권사에서 은행으로 이전한 자금은 1조 2984억 원이었다. 은행에서 증권사로 이동한 금액이 반대 방향보다 약 4배 많았다.
최대 수혜자는 증권사, 4조 1513억 원 순유입
업권 간 자금 이동만 놓고 보면 실물이전 제도의 최대 수혜자는 증권업권이다. 동일 업권 내 이동까지 포함한 증권사의 총 유입액은 8조 5809억 원, 유출액은 4조 4296억 원이었다. 이에 따라 순유입 규모는 4조 1513억 원에 달했다. 반면 은행은 6조 1785억 원이 들어오고 10조 1499억 원이 빠져나가 3조 9714억 원 순유출을 기록했다. 보험 역시 1조 1105억 원이 유입되고 1조 2903억 원이 유출돼 1799억 원 순유출됐다.
| 업권 | 유입액 | 유출액 | 순유입 |
| 은행 | 6조 1785억 원 | 10조 1499억 원 | -3조 9714억 원 |
| 증권 | 8조 5809억 원 | 4조 4296억 원 | +4조 1513억 원 |
| 보험 | 1조 1105억 원 | 1조 2903억 원 | -1799억 원 |
다만 이 수치는 같은 업권 내 금융회사 간 이동을 포함한 금액이다. 업권 간 이동만 따로 보더라도 방향은 같다. 증권업권은 은행과 보험사로부터 5조 9748억 원을 유치한 반면 다른 업권으로 빠져나간 금액은 1조 8235억 원이었다. 은행은 다른 업권에서 1조 6968억 원을 받아들였지만 5조 6682억 원이 다른 업권으로 이동했다.
IRP와 DC는 증권사, DB는 은행·보험사
더 중요한 특징은 퇴직연금 제도별로 자금의 이동 방향이 크게 다르다는 점이다. 실물이전 규모는 IRP가 6조 7695억 원으로 가장 컸다. DC형은 4조 8192억 원, DB형은 4조 2812억 원이었다. 전체 실물이전 금액의 약 43%가 IRP에서 발생한 것이다.
IRP에서는 증권사의 강세가 두드러졌다. 증권사 IRP로 유입된 금액은 5조 2727억 원인 반면 유출액은 2조 2301억 원에 그쳐 3조 426억 원의 순유입을 기록했다. 은행 IRP는 2조 7544억 원, 보험은 2882억 원 순유출됐다. DC형에서도 같은 흐름이 나타났다. 증권사는 2조 9172억 원이 유입되고 9104억 원이 유출돼 2조 68억 원 순유입을 기록했다. 반면 은행은 1조 5815억 원, 보험은 4253억 원 순유출됐다. 흥미로운 것은 DB형이다. 흐름이 정반대다. DB형에서는 증권사가 8980억 원 순유출을 기록한 반면 보험사는 5336억 원, 은행은 3644억 원 순유입됐다. 금감원도 “DB는 증권사에서 은행 및 보험사로, DC와 IRP는 은행과 보험사에서 증권사로의 이동이 두드러졌다”고 분석했다.
이는 퇴직연금 시장을 하나의 시장으로 바라보기보다 DB와 DC·IRP를 서로 다른 경쟁시장으로 볼 필요가 있음을 보여준다. DB에서는 기업의 자금 관리와 원리금 보장 상품 경쟁력이 중요한 반면, 가입자가 직접 상품을 선택하는 DC와 IRP에서는 ETF·펀드 등 투자 상품의 선택 폭과 거래 편의성이 금융회사 선택에 더 큰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이는 금감원이 직접 제시한 원인 분석이라기보다 이번 통계에서 읽을 수 있는 시장적 함의다.
실물이전의 영향. ‘수익률’보다 금융회사의 선택권
실물이전 제도의 의미는 단순히 16조 원 가까운 돈이 움직였다는 데 그치지 않는다. 과거 퇴직연금 시장의 경쟁은 신규 가입자를 확보하는 경쟁에 가까웠다. 일단 특정 금융회사에 퇴직연금을 맡기면 다른 회사로 이동하는 데 상당한 불편이 따랐기 때문이다. 실물이전은 이 구조를 바꾸고 있다. 특히 IRP와 DC 가입자는 상품을 매도하지 않고도 사업자를 변경할 수 있게 되면서 금융회사의 상품 라인업과 투자 플랫폼, 자산 관리 서비스 등을 비교해 사업자를 선택하기 쉬워졌다.
결국 실물이전은 퇴직연금 시장의 경쟁 단위를 ‘계좌 확보’에서 ‘계좌 유지’로 바꾸는 제도가 될 가능성이 있다. 이번 통계에서 나타난 증권사로의 자금 이동은 이런 변화의 초기 모습을 보여준다. 앞으로 금융회사 입장에서는 퇴직연금 계좌를 유치하는 것만큼 기존 가입자가 다른 회사로 떠나지 않도록 만드는 것이 중요해질 수밖에 없다.
DC에서 다른 회사 IRP로도 실물이전 추진
제도는 한 단계 더 확대될 전망이다. 현재 실물이전은 DB에서 DB, DC에서 DC, IRP에서 IRP처럼 동일한 제도 사이에서만 가능하다. 이 때문에 퇴직하면서 DC 적립금을 다른 금융회사의 IRP로 옮기려는 경우에는 실물이전 서비스를 이용하기 어렵다. 환매가 중단된 펀드를 보유하고 있어도 계좌 이전에 제약이 있다.
금감원은 이를 개선하기 위해 예탁결제원과 금융협회, 한국증권금융, 주요 퇴직연금 사업자 등 17개 기관이 참여하는 ‘퇴직연금 실물이전 개선 TF’를 출범시켰다. 핵심 과제 가운데 하나가 DC에서 다른 사업자의 IRP로 실물이전할 수 있도록 전산 시스템을 구축하는 것이다. 환매 중단 펀드를 이전 가능 상품에 포함하는 방안도 논의한다. 이전 의사를 확인하기 위해 녹취를 의무화하면서 절차가 지연되는 문제도 손질한다. 비대면으로 이전 의사를 확인할 수 있는 안전한 방식을 마련하고, 이전 신청이 취소되거나 거절됐을 때 그 이유를 가입자에게 상세하게 알려주는 방안도 추진한다. 금감원은 오는 9월까지 개선 방향을 확정하고 10월부터 전산 개발에 들어가 2027년까지 관련 TF 작업을 마무리할 계획이다.
실물이전 시행 후 약 20개월간의 통계가 던지는 메시지는 분명하다. 퇴직연금 가입자는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움직임은 무작위가 아니다. 기업이 주도하는 DB와 개인의 투자 선택이 중요한 DC·IRP 사이에서 금융회사에 요구하는 경쟁력이 달라지고 있다. 특히 IRP와 DC에서 나타난 증권사로의 자금 이동이 이어진다면 실물이전은 단순한 계좌 이전 편의 제도를 넘어 퇴직연금 시장의 업권별 점유율을 다시 짜는 변수가 될 가능성이 크다. 이제 퇴직연금 사업자에게 중요한 질문은 “얼마나 많은 계좌를 갖고 있는가”에서 “가입자가 왜 이 계좌에 계속 머물러야 하는가”로 바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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