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 2막, 오래 한 일을 하자
새로운 일을 찾기 전에 돌아봐야 할 것…20~30년의 경험을 ‘자산’으로 바꾸는 법
▶필자 소개
필자는 현재 수도권 대학에서 ‘보좌관에 대한 이해와 국회 취업’이라는 제목으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강의 중 학생들이 가장 궁금해하는 것은 ‘좋아하는 일을 해야 하는지’, 아니면 ‘잘하는 일을 해야 하는지’입니다. 그런데 이 질문은 비단 청년들만의 것은 아닙니다. 퇴직을 앞둔, 혹은 이미 퇴직한 사무직 직장인들이 인생 2막을 앞두고 던지는 질문도 이와 똑같기 때문입니다.
퇴직자를 위한 언론 보도나 책을 보면 한결같이 이렇게 말합니다. “20~30년 동안 가족 부양을 위해 ‘해야만 하는 일’을 하고 살았으니, 이제는 ‘하고 싶은 일’을 하라.” 얼핏 들으면 맞는 말 같습니다. 그런데 저는 이 조언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여기에는 학생들이 진로를 고민할 때와 똑같은 함정이 숨어 있기 때문입니다.
강의에서 학생들에게 “뭘 좋아하는지 아니?”라고 물으면 열에 아홉은 “모르겠다”고 답합니다. “그럼 뭘 잘하는지는 아니?”라고 물어도 반응은 마찬가지입니다. 퇴직자라고 다를까요? 20~30년 동안 한 조직에서 정해진 업무만 해온 사람에게 “퇴직 후 뭘 하고 싶으세요?”라고 물으면, 대부분 쉽게 답을 내놓지 못합니다. 가족을 부양하며 먹고살기 바빠 평생 자신에게 그런 질문을 던져본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결국 하고 싶은 일을 찾으라는 조언은, 답을 모르는 사람에게 답을 찾아오라고 등을 떠미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잘하는 일을 하라’는 조언도 무책임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막상 잘하는 것을 꼽아보려고 해도 무엇 하나 뚜렷하게 잡히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설령 잘하는 일이 저마다 여러 가지라 한들, 더 큰 문제는 그 일이 시장에서, 즉 타인에게 어떤 가치를 주는지와는 별개라는 점입니다. 내가 잘하는 것과 남이 필요로 하는 것이 일치하지 않는 경우가 훨씬 많기 때문에, 단순히 잘하는 일만 내세워서는 수익을 창출하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저는 퇴직자에게 이렇게 말씀드립니다. “하고 싶은 게 뭐냐고 묻지 말고, 당신이 가장 오래 해온 일이 무엇이냐고 스스로에게 물어보십시오.” 오래 해왔다는 것은 그 일을 수없이 반복할 기회가 있었다는 뜻이고, 반복했다는 것은 그 과정에서 숱한 판단과 시행착오를 거쳤다는 뜻입니다. 그 안에는 책 한 권으로 다 담을 수 없는 진짜 지식이 쌓여 있습니다. 오랜 시간 해왔으니 잘하는 것은 당연지사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그 경험이 실제 현장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곧바로 쓰인다는 사실입니다. 누군가는 책을 읽고도 어디에 적용해야 할지 몰라 헤매지만, 오랜 세월 그 일을 해온 사람은 무엇부터 살펴봐야 하는지 몸으로 압니다. 바로 이 차이가 ‘단순한 경력’을 ‘자산’으로 바꿔놓습니다.
물론 오래 했다고 해서 무조건 자산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같은 일을 같은 속도, 같은 방식으로 반복만 했다면 그것은 그저 연차가 쌓이는 단순 반복에 불과합니다. 하지만 반복할 때마다 문제를 조금씩 다르게 보고, 더 효율적인 방법을 찾아내기 위해 고민했다면 이야기는 달라집니다. 제가 국회에서 일하던 초창기에는 국정감사 기간에 2~3개 기관을 감당하는 것조차 벅찼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며 5~7개 기관을 거뜬히 맡게 되었고, 나중에는 상임위원회 전체를 혼자 조율할 수 있는 수준에 이르렀습니다. 25년 동안 같은 업무 영역에 몸담았지만, 해가 갈수록 같은 시간에 더 많은 일을 더 정확하게 해낼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축적된 역량이 바로 저만의 노하우이자 자산입니다. 저는 현재 바로 이 자산을 강의와 저술이라는 지식 상품으로 발전시켜, ‘생계’와 ‘일자리’라는 두 가지 현실적 문제를 동시에 해결하고 있습니다.
오래 직장생활을 한 사람은 보고서를 어떻게 써야 통과되는지 압니다. 회의를 오래 주관한 사람은 무엇이 중요하고 무엇을 놓치면 안 되는지를 정확히 꿰뚫고 있습니다. 영업을 오래 한 사람은 고객이 어느 순간 마음을 바꾸는지 감으로 알아챕니다. 조직을 관리해본 사람은 문제가 터지기 전에 미리 나타나는 신호를 감지합니다. 이런 것들은 자격증 한 장으로 증명되지 않으며, 시험공부로 얻어지는 지식도 아닙니다. 그래서 정작 본인조차 이것을 가치 있는 자산이라 여기지 않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하지만 바로 이런 현장 밀착형 지식이 시장에서 가장 오래, 가장 강하게 살아남습니다.
AI 시대에는 이 차이가 더욱 중요해집니다. 정보는 이제 누구나 쉽게 얻을 수 있고, 새로운 지식도 AI에 물으면 금세 정리해줍니다. 그렇다면 사람이 가진 것 중 무엇이 오히려 희소해질까요? 바로 직접 몸으로 부딪히며 쌓은 ‘맥락’과 ‘판단’입니다. AI는 방대한 정보를 처리하고 그럴듯한 결과물을 만들어낼 수 있지만, 사람이 현장에서 오래 일하며 체득한 맥락과 판단까지 대신해줄 수는 없습니다. 같은 정보를 보고도 어떤 사람은 그 안에서 중요한 신호를 알아채고, 어떤 사람은 그냥 지나칩니다. 같은 문제를 만나도 어떤 사람은 어디서부터 풀어야 할지 바로 압니다. 이 차이는 하루아침에 생기지 않습니다. 오랜 시간 일하며 실패하고, 다시 시도하고, 상황을 판단하는 과정에서 조금씩 쌓인 결과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현실에서 사무직 퇴직자 대부분은 정작 자신이 오래 해온 일과는 무관한 길로 들어섭니다. 길어야 2~3년 하고 마는 사무직으로 재취업하거나, 카페나 치킨집 같은 자영업에 뛰어듭니다. 혹자는 전혀 생소한 노후 대비용 자격증을 새로 따기도 합니다. 왜 이 세 갈래 길이 문제인지는 다음 칼럼에서 좀 더 자세히 다뤄보겠습니다. 다만 여기서 분명히 짚어두고 싶은 것은, 그 갈림길 앞에서 스스로에게 던져야 할 질문이 “내가 뭘 하고 싶지?”나 “내가 뭘 잘하지?”가 아니라는 점입니다.
“내가 무엇을 가장 오래 해왔는가?” 인생 2막의 출발점은 바로 이 질문에서 시작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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