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금경제] 기금형 퇴직연금, '제도 설계의 정교함'이 관건
남재우 자본시장연구원 리포트
▶필자 소개
정부와 노사정이 기금형 퇴직연금 도입 논의를 마무리 짓는 단계에 이르렀지만, 정책의 실효성을 두고는 여전히 다양한 우려가 제기되고 있습니다.
자본시장연구원의 남재우 선임연구위원은 지난 14일 발표된 보고서를 통해 퇴직연금의 본질은 단순히 적립금 규모를 늘리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실질적인 노후소득 증대’를 이끌어내는 데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기금형 퇴직연금이 연착륙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각 기금의 설립 목적에 맞게 제도를 얼마나 정교하게 설계하느냐가 핵심 관건이라는 점을 짚어낸 것입니다.
개별 상품 선택 대신 기금 운용으로, ‘옵트아웃’ 도입 절실
지금의 퇴직연금 체계는 가입자가 수많은 상품 중 하나를 직접 선택해야 하기에 투자에 대한 부담이 클 수밖에 없습니다. 반면 기금형 퇴직연금은 전문 운용조직이 장기적인 관점에서 자산 배분과 리밸런싱을 도맡아 수행합니다. 가입자는 자신에게 적합한 기금 하나만 선택하면 되기에 복잡한 투자 고민을 덜 수 있고, 언제든 다른 기금으로 이동할 수 있어 선택권 또한 충분히 보장됩니다.
특히 이번 보고서는 현행 ‘사전지정운용제도(디폴트옵션)’가 제 기능을 다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을 지적했습니다. 현재의 ‘옵트인(opt-in)’ 방식은 가입자가 직접 선택해야만 투자가 이루어지기에, 방치된 계좌를 해결하는 데 한계가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별도의 선택이 없어도 전문가의 운용이 자동으로 시작되되, 가입자가 원할 때 언제든 변경할 수 있는 ‘옵트아웃(opt-out)’ 구조를 통해 실질적인 디폴트 기능을 수행하도록 제도를 개선해야 한다고 제언했습니다.
기금형 퇴직연금의 성공요건
보고서는 기금형 퇴직연금의 성공을 위해 세 가지 유형별 전략을 각각 제시했습니다. 우선 공공형 기금은 중소기업 근로자 등 퇴직연금 사각지대를 해소하는 데 그 목적이 있는 만큼, 기금 규모보다는 가입 확대와 수급권 보호를 성과의 척도로 삼아야 합니다. 반면, 업종이나 지역별 사업장이 공동으로 기금을 조성하는 비영리 연합형 기금은 노사가 대표성을 갖되, 자산운용만큼은 독립적인 전문 조직이 전담하는 운영 체계를 갖춰야 합니다. 또한 금융기관 개방형 기금은 금융사의 전문성을 활용해 수익률을 높이는 데 집중하되, 계열사 상품 편입 같은 이해상충 문제를 엄격히 관리하면서도 지나친 규제가 경쟁력을 꺾지 않도록 세심하게 접근해야 한다는 설명입니다.
아울러 기금형 퇴직연금 성공의 핵심으로 수탁자 책임(Fiduciary Duty)을 꼽았습니다. 기금 운영은 ▲이사회가 운용원칙을 결정하고 ▲전문 운용조직이 투자하며 ▲독립된 자산관리기관이 자산을 보관하고 ▲감독기관이 성과와 이해상충을 점검하는 구조가 되어야 합니다. 또한 가입자 이익 최우선 원칙, 이해상충 통제, 투명한 성과 공시, 저성과 기금 퇴출, 가입자의 자유로운 기금 이동권 등이 함께 보장될 때 기금형 제도가 제대로 작동할 수 있다고 강조했습니다.
같은 규제보다 목적별 설계 필요
무엇보다 중요한 점은 모든 기금을 똑같은 잣대로 규제하려는 관행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가입률 증대가 목표인 공공형 기금과 수익률 제고가 목표인 금융기관형 기금에 같은 규제를 적용하는 것은 효율적이지 않습니다. 각 기금이 가진 고유한 가치를 살릴 수 있도록 유형별로 차별화된 성과지표를 적용하는 유연한 접근이 필요합니다.
결국 기금형 퇴직연금 도입이 지향해야 할 방향은 명확합니다. "선택하지 않으면 방치되는 연금"에서 "선택하지 않아도 전문가가 알아서 운용해 주는 연금"으로 패러다임을 전환하는 것입니다. 장기 분산투자를 기반으로 한 전문 운용체계와 투명한 공시, 그리고 기금 간의 건강한 경쟁 환경이 함께 조성될 때 퇴직연금은 비로소 국민의 안정적인 노후를 지키는 든든한 버팀목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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