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금경제] 연금, 결국 잘 쓰는 것이 핵심
100세 시대, 노후 자산 '인출 전략' 필요하다
▶필자 소개
은퇴는 경제 활동을 통해 정기적으로 들어오던 월급 등 소득이 완전히 끊기는 것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은퇴 이후에는 그동안 축적한 자산을 바탕으로 '어떻게 매월 안정적인 현금흐름을 창출할 것인가'로 삶의 패러다임이 전환됩니다. 자산의 절대적 규모도 중요하지만, 은퇴 후 삶의 질을 결정짓는 핵심 지표는 결국 매달 통장에 찍히는 규칙적이고 예측 가능한 현금흐름입니다. 실제로 주변을 둘러보면 수억 원대의 은퇴 자산을 보유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원금 고갈에 대한 막연한 공포와 불안감 때문에 제대로 쓰지도 못한 채 삶의 질이 떨어진 은퇴자들을 쉽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노후 자산을 성실히 축적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이를 적시에 효율적으로 꺼내 쓰는 '인출 전략(Withdrawal Strategy)'이 그 어느 때보다 강조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노후 준비의 궁극적 목적은 자산의 단순한 증식이 아니라, 삶의 후반전에 필요할 때 적정하게 소비하기 위함이기 때문입니다.
약 954만 명에 달하는 2차 베이비부머 세대(1964~1974년생)가 2024년부터 법정 퇴직 연령인 60세에 본격적으로 진입하면서, 인출 패러다임의 변화는 인구구조적 변동과 맞물려 국내에서 더욱 가속화되고 있습니다. 이에 따라 한국 사회 전반에서 연금 인출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급격히 높아지고 있습니다. 퇴직금을 일시금이 아닌 연금 형태로 수령하려는 전환 수요가 증가하고, 보유 주택을 활용해 주택연금으로 부동산을 현금화하려는 경향이 활발해지는 점이 이를 명확히 보여줍니다. 고용노동부 통계에 따르면 퇴직연금 수령 방법 중 연금 선택 비율(금액 기준)은 2021년 말 34.3%에서 2025년 말 61.6%로 급격히 상승했습니다.
이러한 통계 수치 뒤에는 신중히 파악해야 할 착시 효과가 존재합니다. 현행 퇴직연금 통계는 일시금 수령이 아닌 모든 나누어 받는 방식을 연금 수령으로 일괄 분류하는 한계를 지니고 있습니다. 퇴직금을 단 10회 분할 수령하는 것까지 연금으로 집계하는 구조인데, 이는 노후 전체를 관통하는 진정한 의미의 연금(Annuity)으로 보기는 어렵습니다. 2025년 기준 계좌 금액 측면에서는 연금 수령 비율이 61.6%까지 확대되었지만, 계좌 수 기준으로는 여전히 83.5%의 퇴직자가 일시금 방식을 선택하고 있습니다. 이는 퇴직연금 적립 자산이 상대적으로 큰 고액 자산가 그룹을 중심으로만 연금 수령이 이뤄지고 있으며, 대다수 일반 퇴직자들은 여전히 일시금으로 자금을 찾아가 소진하고 있음을 시사합니다.
일부 은퇴자들은 모든 자산을 현금화하여 은행 예금 통장에 넣고 필요할 때마다 꺼내 쓰면 된다고 단순하게 생각합니다. 혹은 반대로 모든 자산을 보험사의 즉시납 연금보험 등 종신연금으로 일괄 가입하여 사망 시까지 고정 금액을 수령받는 방식을 취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 두 가지 극단적 선택은 모두 치명적인 약점을 안고 있습니다. 전자는 예상보다 길어진 수명으로 인해 생존해 있는 동안 자산이 먼저 고갈될 위험(Longevity Risk)에 노출됩니다. 후자는 갑작스러운 질병이나 사고 등으로 목돈이 필요할 때 유연하게 자금을 인출할 수 없고, 물가 상승에 따른 실질 구매력 하락 위험에 무방비로 노출되는 한계가 있습니다. 따라서 노후 자산의 특성을 정교하게 파악한 입체적 인출 전략이 절실합니다.
은퇴 후 맞이하게 되는 4대 재무적 리스크
바람직한 연금 인출 전략을 수립하기 위한 첫걸음은 은퇴 후 개인이 직면하게 되는 정교한 재무적 리스크를 명확히 이해하는 것입니다. 노후의 재무적 위험은 크게 네 가지로 구별됩니다.
첫째, 소득 단절 및 소득 구조 변동 리스크입니다. 은퇴와 동시에 근로소득은 급감하며, 금융자산에 대한 의존도가 기하급수적으로 높아집니다.
통계청의 2023년 가계금융복지조사에 따르면, 50~59세 가구주의 연평균 근로소득은 5,908만 원에 달하지만 60세 이상이 되면 2,171만 원으로 3분의 1 수준으로 급감합니다. 반면 이자 및 배당 등 재산소득은 50대(447만 원) 대비 60세 이상(644만 원)에서 소폭 증가하는 경향을 보입니다. 은퇴 전에는 보유 부동산의 시세나 총자산 금액의 크기가 중요했지만, 은퇴 후에는 매월 통장에 지속적으로 입금되는 현금흐름의 유무가 생존을 결정짓는 핵심 요소로 변모합니다.
둘째, 장수 리스크(Longevity Risk)입니다. 이는 개인의 생존 수명이 축적한 자산의 수명보다 길어져, 살아있는 동안 은퇴 자산이 먼저 바닥나는 위험을 의미합니다. 예컨대 은퇴 자산 3억 원을 보유한 60세 은퇴자가 90세까지 살 것을 가정하고 360개월 동안 매월 83만 원씩 원금을 나누어 인출했다고 가정해 보겠습니다. 만약 90세에 자산이 완전히 고갈되었으나 은퇴자가 100세까지 건강하게 생존한다면, 남은 10년은 극심한 빈곤 속에 처하게 됩니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자신의 기대수명을 실제보다 낮게 평가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반대로 수명을 너무 과대평가하여 지나치게 지출을 줄이며 '자린고비'처럼 살다가 자산을 다 쓰지 못하고 사망하는 것 역시 비효율적인 리스크입니다. 문제는 그 누구도 자신이 몇 살까지 살지 정확히 알 수 없다는 불확실성에 있습니다.
셋째, 인플레이션 리스크(Inflation Risk)입니다. 최근 국내외적인 통화량 증가와 물가 상승은 화폐 가치를 급격히 떨어뜨리고 있습니다. 정기 소득이 없는 은퇴자에게 물가 상승은 자산 가치를 실질적으로 잠식하는 가장 치명적인 위협입니다. 과거에는 월 200만 원으로 충분했던 은퇴 생활비가 물가 상승으로 인해 이제는 월 300만 원 이상을 필요로 합니다. 국민연금공단의 '국민노후보장패널조사' 자료는 이러한 생활비의 가파른 상승세를 잘 보여줍니다. 2013년 부부 기준 적정 노후 월 생활비는 225만 원 수준이었으나, 10년 뒤인 2023년에는 296.9만 원으로 약 32% 급증했습니다. 이러한 추세가 계속된다면 오는 2041년에는 적정 노후 생활비가 월 400만 원을 넘어설 것으로 추정됩니다. 인플레이션을 방어하지 못하는 인출 전략은 시간이 지날수록 생활 수준을 급격히 퇴보시킵니다.
넷째, 인지능력 저하에 따른 재무관리 리스크입니다. 고령화에 따라 치매나 중증 질환, 고령으로 인한 판단력 저하가 발생할 경우 은퇴자가 스스로 복잡한 자산 운용과 인출을 관리하기 어려워집니다. 인지 능력이 하락한 상태에서 금융 사기를 당하거나 잘못된 재무적 결정을 내릴 경우, 평생 쌓아온 노후 자산이 단번에 고갈되는 비극을 맞이할 수 있습니다.
노후 재무 리스크를 고려한 최적의 인출 전략
네 가지 노후 재무 리스크를 극복하기 위한 은퇴 후 인출 전략의 최종 목표는 "사망할 때까지 물가상승률 이상으로 연금액이 늘어나면서, 안정적이고 자동적으로 지급되는 현금흐름을 충분히 확보하는 것"으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3층 연금 체계(국민연금·퇴직연금·개인연금) 중 공적연금인 국민연금은 이와 같은 조건에 가장 부합하는 제도입니다. 국민연금은 국가가 지급을 보장하며, 평생 수령이 가능하고, 매년 물가상승률을 반영하여 연금 지급액을 올려주기 때문에 장수 리스크와 인플레이션 리스크를 동시에 방어합니다. 그러나 국민연금의 소득대체율 한계로 인해 공적연금만으로 적정 노후 생활비를 충당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합니다. 결국 핵심은 사적연금(퇴직연금 및 개인연금)과 기타 금융자산을 어떻게 효율적인 은퇴소득으로 전환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국민연금의 수령 시기와 금액은 제도로 정해진 '주어진 변수'로 두고, 공적연금과 결합해 최적의 현금흐름을 만들어낼 수 있는 사적연금 중심의 인출 조합을 설계해야 합니다. 특히 퇴직연금은 향후 사적연금 시장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할 자산이므로 인출 전략의 핵심 축이 됩니다.
연금 제도가 발달한 해외 선진국들은 장수 위험과 인플레이션 위험을 동시에 제어하기 위해 인출 상품과 제도를 다각도로 발전시켜 왔습니다. 미국은 초고령화에 따른 장수 리스크에 대응하고 확정기여형(DC) 퇴직계좌에서 평생 소득을 확보할 수 있도록 2019년 'SECURE법(Setting Every Community Up for Retirement Enhancement Act)'을 제정했습니다. 미국 제도의 핵심 중 하나는 적격장수연금(QLAC; Qualified Longevity Annuity Contract)의 활성화입니다. 장수연금이란 일시 납입 후 80세나 85세 등 초고령 시점부터 연금 수령을 시작하는 이연연금 상품입니다. 미국 정부는 DC 계좌나 IRA 자금 일부를 QLAC에 투자할 경우 일정 상한선에 대해 세제 혜택 및 최소인출규제(RMD) 예외를 부여함으로써 국민들이 자발적으로 초고령기 장수 리스크에 대비하도록 유도했습니다. 민간 금융회사 또한 장수연금 지급 전까지 일임계좌(Managed Account)를 통해 자산을 지속 운용할 수 있는 고도화된 인출 상품을 개발하여 제공하고 있습니다.
호주는 연금 수령자에게 '안정적 소득', '장수위험 방어', '유연한 인출'이라는 3대 요소를 복합적으로 제공하는 은퇴소득 상품(CIPR; Comprehensive Income Products for Retirement) 체계를 구축했습니다. 대표적으로 계좌인출연금(Account-based Annuity)과 장수연금(Group Self-Annuitization 등)을 조합한 세 가지 포트폴리오 유형이 활용됩니다. 계좌인출연금은 시장 투자를 병행하여 인플레이션을 방어하는 데 유리하지만 장수 위험에는 약하며, 장수연금은 평생 소득을 보장하여 장수 위험을 방어하지만 물가 상승 반영에는 취약합니다. 호주는 이를 상호보완적으로 결합했습니다.
맞춤형 연금 인출 전략 수립 위한 4단계 프로세스
국내에서도 은퇴 인출 수요가 폭발적으로 증가하는 만큼, 개인 역시 자신의 라이프스타일과 자산 구조에 맞는 체계적인 인출 전략을 수립해야 합니다. 나만의 맞춤형 연금 인출 전략은 다음의 4단계 프로세스를 거쳐 완성됩니다.
첫째, 노후 생활에 대한 구체적인 목표와 자금 사용 라이프스타일을 설정합니다. 은퇴 초기에 신체적으로 건강할 때 여행 및 여가 활동 비용을 많이 지출하는 '전초후약'형 삶을 추구할 것인지, 은퇴 기간 전체에 걸쳐 균등한 비용을 지출하는 '평탄화'형을 택할 것인지, 아니면 은퇴 초기에는 절약하고 후기의 의료·간병비에 집중 투입한 후 남은 자산을 상속할 것인지를 결정해야 합니다. 이 목표에 따라 연금 인출 스케줄의 뼈대가 결정됩니다.
둘째, 국민연금의 수령 시기를 전략적으로 선택합니다. 국민연금은 법적으로 수령 형태를 바꿀 수는 없지만, 수령 시점을 조정하는 '조기노령연금'과 '연기연금' 옵션을 가입자가 선택할 수 있습니다. 정상 수급 연령보다 앞당겨 받는 조기연금은 1년당 6%씩(최대 5년 조기 시 30%) 연금액이 감액됩니다. 반대로 수령을 뒤로 미루는 연기연금은 1년당 7.2%씩(최대 5년 연기 시 36%) 연금액이 증액됩니다. 평균 수명이 연장되는 100세 시대에는 건강 상태와 은퇴 직후 소득 공백기(소득 크레바스) 유무를 고려하되, 가급적 연금을 연기하여 평생 받는 공적연금의 파이를 키우는 것이 장수 리스크 대비에 유리합니다.
셋째, 사적연금과 기타 금융자산의 인출 순서 및 금액을 산정하고 절세 전략을 결합합니다. 국민연금으로 충당되지 않는 부족한 생활비를 계산한 후, 퇴직연금(IRP)과 개인연금, 일반 금융자산을 어떤 순서로 인출할지 결정합니다. 이때 반드시 세금 구조를 고려해야 합니다. 퇴직연금과 연금저축 등은 인출 시점에 자금의 원천에 따라 퇴직소득세와 연금소득세 등이 과세되므로, 일시금으로 인출하기보다 20년 이상의 장기 연금 형태로 분할 수령하여 연금수령한도 내에서 세제 혜택을 최대화하는 것이 핵심입니다.
넷째, 부족한 현금흐름을 보완할 추가 자산을 확충합니다. 1~3단계를 거쳤음에도 목표 노후 생활비에 못 미친다면, 보유 중인 주택을 활용한 주택연금에 가입하여 추가적인 평생 현금흐름을 확보하거나 기타 부동산을 유동화해야 합니다. 여의치 않을 경우 거주 비용이나 물가가 상대적으로 저렴한 지역으로 이주하여 생활비 지출 규모 자체를 낮추는 대안도 고려할 수 있습니다.
삶의 모습이 저마다 다르듯 노후의 모습 또한 '백인백색'입니다. 노후 자산을 단지 쌓아두는 것에만 만족하지 않고, 자신의 생애주기에 맞춰 정교하게 인출해 쓰는 지혜를 발휘할 때 비로소 은퇴 후의 삶은 불안이 아닌 여유와 풍요로 채워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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